재미교포 단암 정찬열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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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교포 단암 정찬열 선생

퇴허자 광주 대각사 주지
자고로 ‘3인행 필유아사(三人行 必有我師)’라 했던가. 셋이서 길을 걷다보면 반드시 그 중에 나의 스승이 있다고 하였다. 여기서 스승이란 두 가지 의미를 지닌다. 하나는 그릇된 행동을 일삼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둘은 우리에게 귀감이 될 만한 모범적인 삶을 사는 사람이 그렇다. 양쪽 모두가 우리의 스승이 될 수 있다. 첫 번째 그릇된 사람에게서는 나는 저런 행동을 하지 않겠다는 반면교사를 삼아 배우는 것이요 두 번째 모범적인 삶을 사는 사람으로부터는 그를 본받겠다는 원력을 갖게 됨으로써 우리의 훌륭한 스승이 될 수 있다는 말이다.
우리 주변을 자세히 살펴보면 훌륭한 삶을 통해서 우리에게 사표(師表)가 되는 사람을 가끔 만난다. 오늘 얘기 되는 단암 정찬열선생도 그 중의 한 분이다. 그와의 만남은 광주매일신문에 서로 칼럼을 쓰게 되면서 현 광주매일신문 이경수 대표이사를 통해서 소개를 받았다. 소탈하면서도 조용한 그 인품이 매우 호감을 주었다. 그는 38년 전 미국 캘리포니아 오렌지카운티로 이민을 갔는데 그 곳에서 칼럼과 수필, 시를 써왔으며 한때 교포들을 대상으로 ‘한국학교’를 개설해 교장이 되기도 했다. 그의 열정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다양한 직업군을 통해 경제적 안정이 되자 한 달여 동안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를 마쳤고 이어서 내나라 내 땅을 밟는다는 슬로건을 내세우며 환갑의 나이에 귀국, 해남 땅 끝에서 강원도 고성 통일전망대까지 국토종단을, 그리고 이어서 고성에서 강화도까지 국토횡단을 감행하였다. 그는 국토종단 직전 광주 대각사로 나를 찾아와 잠시 대화를 나눴는데 “단암선생! 소 한 마리를 끌고 걸어가시오”라는 제안을 했더니 “아이고, 스님 저 혼자서 천리길을 걸어가야 하는데 어떻게 소를 끌고 가야한단 말입니까?” 라도 답했다. 아마 그는 정주영회장이 소떼를 몰고 북한방문을 했던 상상을 했을 터이다. 그래 내가 설명을 했다. 여기 내가 사용하던 지팡이를 하나 줄 것이니 광주 예술의 거리에 가서 ‘워낭’을 하나 구입해 지팡이에 매달고 워낭소리를 들으면서 한발한발 걸어가라는 뜻임을 설명했다. 그래서야 그는 내 말뜻을 알아채었다. 이런저런 정담을 나누는 사이 그날 함께 왔던 부인은 내가 건네주는 당부의 말을 열심히 적고 있었다. 잠시 후 그들은 해남 땅끝을 향해 출발했다.
그 후 한 달여가 지나서 단암선생은 다시 내 앞에 나타났다. 국토종단을 마치고 개선장군처럼 표정도 밝고 씩씩한 모습이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부인도 곁에서 보름동안 함께 동행했었다는 얘기를 전해 들었다. 아무튼 단암은 대단한 실천가다. 일단 마음에 담으면 끝장을 보는 그의 의지력은 바로 오늘의 단암 자신을 만드는 원동력이 됐음에 틀림이 없다.
그는 전남 영암출신으로 21살까지는 중졸에 시골뜨기였다. 그러던 그가 어느 날 밭두렁에 벌렁 누어 하늘에 뜬 구름을 바라보다가 문득 용기백배해 괭이자루를 팽개치고 그길로 광주로 줄행랑을 침으로써 그의 인생이 180도로 바뀌는 계기가 됐다. 그는 광주에서 온갖 궂은일을 다 하면서 진학의 꿈을 키우다가 급기야 광주상고 야간을 졸업 후 검정고시를 거쳐 방송통신대와 성균관대학교, 대학원까지 마치고 교원자격으로 한동안 교사생활을 하다가 부인을 만나 결혼하고 곧 이어 미국이민을 떠났던 것이다. 그의 이러한 입지전적인 삶은 오늘날 많은 이들에게 큰 교훈을 깨우쳐 준다고 본다.
그는 이제 70대 중반을 맞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기회를 만들어 제주 올레길 27개 풀코스를 완보(緩步)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얼마 전 제주를 다녀갔는데 우리 명상원에 며칠 머무는 동안 성산일출봉과 우도를 탐방하고 제주4·3평화공원과 돌문화공원, 파파빌레 등을 찾아 갔었다. 그런데 걷는 기력이 왠만한 청년 못지않게 아직도 내공이 엿보였다.
그가 남긴 발자취 가운데 산문집 ‘쌍코뺑이를 아시나요?’와 ‘내땅 내발로 걷는다’, ‘아픈 허리 그 길을 따라’, ‘산티아고 순례길 따라 2000리’, ‘북녘에서 21일’ 등을 펴냈다. 그리고 2세 뿌리교육을 위한 한국학교 교장으로 20여년 봉사로 ‘페스탈로치상’을 받았으며 오렌지카운티 한인회 이사장, 미주카톨릭문인협회 이사장을 지냈다. 나 역시 그에게 아호 ‘단암(檀岩)’을 선물했다. 아무튼 그는 오늘도 걷는 꿈을 꿀 것이다. 어차피 우리는 길을 걷다 길 위에서 가야할 인생이 아닐까.

영암군민신문 yanew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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