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로스 아르꼬스-로그로뇨-나헤라까지 58.6㎞(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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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10>로스 아르꼬스-로그로뇨-나헤라까지 58.6㎞(계속)

"여러 가지 모습으로 길을 걷는 사람들은 왜 이 길을 그토록 걷고 싶어할까?"

. 먹고 자고 난 다음, 알아서 돈을 통에 넣고 가라고 한다. 이를테면 순례자를 위한 무료 급식소이다.
5시 기상. "좀 더 자면 안될까요?"라고 발레리라 자매님이 혼자말로 중얼거린다. 나도 혼자말로 대답해 드렸다. 집에 가시면 푹 주무세요.
옆 사람에게 방해가 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배낭을 챙겨 나와 짐을 꾸린다. 식당 불을 켜보니 빵과 우유, 그리고 커피를 끓여 마실 수 있도록 준비되어 있다. 도네이션 통에 돈을 넣는데, 김사 장이 그 장면을 찍어두어야 한다면서 카메라를 치켜든다. 벌써 여러날 째 김 사장네 부부와 함께 걷고 있다.
전등불 아래 조가비 표지를 찾아가며 걷는다. 어둡다. 공원에 탁구대가 놓여 있다. 비가 오면 탁구대가 상할텐데 괜찮을까. '기아자동차' 전시관을 지난다. 창문 넘어로 전시해 놓은 차들이 보인다. 반갑다. 길을 따라 순례자들의 동상을 세워놓았다. 서서히 주위가 보이기 시작한다
도네이션 통. 형편에 맞게 알아서 넣고 나가면 된다.
도네이션 통. 형편에 맞게 알아서 넣고 나가면 된다.
벼람박에 낙서가 어지럽다. 낙서는 왜 저렇게 기승을 부릴까. 미국에도 프랑스에도 또 이곳도. 그런데 낙서야 말로 인간심리를 대변하는 흔적이 아닐까 생각되기도 한다. "요즈음 아이들은 버릇이 없다"는 피라밋 지하의 낙서를 통해 그 옛날의 모습을 유추해볼 수 있고. 화장실 낙서만큼 인간 심리를 적나라하게 표현한 곳이 또 어디에 있겠는가.
이정표가 독특하고 재미있다. 아름다움이 무언지 아는 사람들이 만든 작품이다. 배낭을 수레에 담아 끌고 가는 사람이 좌판 앞에 선다. 도사처럼 수염을 기른 할아버지가 좌판을 벌여 놓고 먹거리를 팔면서 순례자증서에 도장을 찍어주고 있다.
알베르게 선전판이 곳곳에 세워져 있고, 철망 울타리에 갖가지 모양의 십자가 형상을 만들어 꼽아 놓았다. 수 백 개는 되겠다. 옷가지로, 양말을 벗어서, 나뭇가지를 꺾어서…. 저것들을 꽂아 놓은 사람의 정성들이 모여 이 까미노가 유네스코 유산으로 지정되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언덕을 넘어서자 철제로 만든 소 모형이 보인다. 이 지방이 목축 주산지임을 표시하는 것인가, 아니면 뿔이 매섭게 돋아있는 걸 보니 투우를 의미하는 것인가 싶기도 하다. 다시 보니 수소의 상징이 덜렁 메달린 걸 보니 투우를 선전하는 게 맞을 성 싶다.
길 양옆으로 포도밭이 계속 이어진다. 아침 이슬을 털면서 노 부부가 포도밭에서 작업을 하고 있다.
Grow is Walking in Storm. Februar 2013. 이라는 글이 노랑 표시판 위에 적혀 있다.
Grow is Walking in Storm. Februar 2013. 이라는 글이 노랑 표시판 위에 적혀 있다.
옛 병원 자리를 지난다. 병원은 스러져 없어졌지만 그 터가 남아 이곳이 병원이 있어 순례자를 치료했었다는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다. 공터 잔디위에서 어제 개를 데리고 순례를 하던 남자가 아침을 준비하고 있다. 텐트를 치고 이곳에서 밤을 세웠나보다.
저렇게 여러 가지 모습으로 사람들이 이 길을 걸어가고 있다. 혼자서 걷는 사람, 부부가 함께 걷는 사람. 친구와 함께 혹은 저렇게 개를 데리고 걷는 사람, 자전거나 말을 타고 가는 사람. 왜 사람들은 이 길을 저렇게 걷고 싶어 할까.
'Santiago 576㎞'가 남았다는 표지판이 서 있다. 커다란 와인 회사 선전판 위에 씌어있다.
나무를 베어낸 자리에 푸른 색 페인트를 칠해놓았다. 상처를 덧나지 않도록 하려는 것일까. 나무를 베어 낸 자리에도 저렇게 아까징끼를 발라 치료를 하는 것일까.
세탁소 간판이 보인다. 아직 문을 열지 않았다. 시간표도 보이지 않는다. 몇 시쯤 영업을 시작할까. 낮잠 자는 시간을 빼면 이 사람들은 하루에 몇 시간 일을 할까.
마음씨 좋은 독일 할아버지. 이날 이후도 여러차례 만나서 함께 걸었다.
마음씨 좋은 독일 할아버지. 이날 이후도 여러차례 만나서 함께 걸었다.
콘도를 짓고 있다. 한 동에 240,500 유로라는 간판이 걸려있다. 달러로 30만불 정도다. 청동으로 만든 '도자기 만드는 남자'의 동상이 서 있다. 이 길을 걸으면서 도처에 청동상을 많이 만나볼 수 있다. 도시나 시골마을에서도 어렵지 않게 조형물을 만나게 된다. 대부분이 아주 오래되어 보이는 조형물이다. 오래전부터 이 나라에 청동이 풍부했다는 반증이며, 그 청동을 이용해 무기를 만들고 저렇게 조형물을 만들어 사람들에게 그들의 생각을 전하려 했던 모양이다. 조형물을 만든 솜씨가 놀라울만큼 정교하고 아름답다. 예술에 대한 감각과 표현능력이 뛰어나다. 저기 보이는 저 동상도 균형 잡힌 모습이 단순하면서도 매혹적이다. 이 지역이 도자기를 만들어 내는 곳임을 상징하는 모양이다.
성당에 들어가 잠깐 조배를 드리고 나왔다. 각 집의 문 앞에 붙어있는 문패가 독특하다 .이름위에 문양이 새겨져 있다. 가문을 표시하는 문양이라고 한다.
아니나 다를까, 한참을 걷다 보니 도자기 파는 곳이 보인다. 공동묘지 바로 옆에서 쉬고 있는데 기 선생과 알렉스를 만났다. 한국인을 만나면 반갑다.
자갈밭에 포도나무가 자라고 있다. 자세히 보니 밭에 돌이 많다. 자갈이 많아서 포도밖에 심을 게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수레에 가방을 메어 끌고 가는 독일 할아버지가 "뭘 그리 보고 있냐"고 말을 건넨다. Waldenmar Rasche라고 본인을 소개한다. 독일에서 왔는데 올해 76세란다. 수레에 배낭을 싣고 걷는데 젊은이 뺨치게 잘 걷는다. 유럽인들의 걸음을 따라갈 수가 없다. 보폭이 크고 빠르다. 우리는 하루 평균 4킬로를 걷는데 저들은 하루 평균 5킬로, 혹은 6킬로쯤 걷는다고 한다.
김 사장은 배낭이 무거워 힘든 모양이다. 등성이를 넘어 황토길을 간다. 제각기 힘으로 각자의 길을 걸어간다. 무거운 짐은 무거운 채로 짊어지고, 가벼운 짐은 또 가벼운 만큼 가벼운 걸음으로, 각자의 운명을 각자가 짊어지고 간다. 힘들어도 도와줄 방법이 없다. 각자의 몫이다.
오늘은 포도밭이 대부분이다. 밀밭이 간간히 보인다. 산등성이 굽이굽이 거의 모든 밭이 포도를 심었다. 관개 시설이 잘 되어 무엇을 심더라도 문제가 없을 성 싶다. 저 멀리 눈 덮힌 산이 아름답다.
돌을 쌓아 만든 움막 같은 시절이 눈에 띈다. 나헤라 시 입구다. 아내와 미세스 김이 기다리고 있다. 한 젊은이가 산악 스쿠터를 몰고 가다가 멋진 포즈를 취한다.
밀가루 공장 담벼락에 시 한편이 10미터도 넘게 길게 적혀있다. 이 근처 성당 에우제니오Eugenio수사님이 써놓은 것이라 한다. "순례자여! 누가 당신을 불렀는가. 어떤 감춰진 힘이 당신을 이곳으로 불렀는가?"로 시작되는 시다. 따지고 보면, 저 글도 낙서가 아닐까.
3시 15분 알베르게 도착. 이곳도 어제처럼 정해진 액수가 없이 도네이션 함에 알아서 돈을 넣으면 된단다.
오늘 이 지방 축제가 있는 모양이다. 평소처럼 시내 구경을 나갔더니 광장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 왁자지껄하다. 중세 기사의 복장으로 검투를 연출하는 사람, 화살통에 활 집어넣기를 하는 아가씨들, 그리고 빵을 구워 팔고 있는 아주머니도 보인다. 빵이 엄청 크다. 병사들이 벼게로 쓰고 뜯어먹기도 하면서 전쟁을 수행했다는 그 빵이다.
나중에 얘기를 듣고 보니 기선생이 그 빵집 아주머니에게서 빵을 샀는데, 스페인 돈에 익숙하지 않아 주머니에 잡힌 대로 동전을 내 밀며 가져가라고 했단다. 그랬더니 터무니없이 많은 돈을 가져가더란다. 만났던 주민들이 모두들 순례자를 도와주려고 애쓰던데 그 사람은 좀 다른 사람이었나 보다.
마켙에서 시장을 봐 왔다. 라면이 있어서 반가운 마음에 몇 개를 사왔다. 한국라면은 없고 일본산이지만 그거라도 어딘가. 주방이 꽤 붐빈다. 한 쪽 테이블에서 이 선생 내외, 우리 일행이 함께 저녁을 먹었다. 라면 맛이 환상(?)이다. 와인 한 잔에 피로가 다 풀리는 성 싶다.
영암군민신문 yanew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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