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헤라에서 산토도밍고 델 라칼자다까지 21㎞
검색 입력폼
 
기획특집

나헤라에서 산토도밍고 델 라칼자다까지 21㎞

“일본에서 남아공에서 프랑스에서…세계 각지서 온 순례객들과 어울려 걷다”

순례길 9일째다. 아침 7시 10분 출발. 작은 산을 넘으니 끝없이 넘실대는 밀밭과 군데군데 노랗게 핀 유채밭이 한 눈에 펼쳐진다. 그 사이로 가르마처럼 난 길을 따라 순례자가 배낭을 지고 걸어간다. 아침 해가 떠오르자 멀리 눈 덮인 산이 이마를 드러낸다. 절경이다. 절경은 형용을 불허한다.
580㎞ 사인이 보인다. 앞에 걸어가는 순례객의 배낭에 작은 베너가 펄럭인다. ‘Camino de Santiego en Japan’이라는 글씨가 보이고, 일본어로 무어라 적혀있다. 이 길에서 일본인은 처음 만난다. 요코하마에 살고 있다는 모도꼬 할머니다. 은퇴한지 오래됐는데 혼자서 왔다고 한다. 며칠 전에 불가리아 여학생 둘이 자기나라 국기를 달고 가는 건 귀엽게 보였는데, 70이 넘은 할머니가 ‘일본을 나타내며’ 걷는 모습은 일제 군국주의의 흔적이 남아있는 성 싶어 좀 거시기하다. 일본에도 유명한 순례길이 있다면서 시코쿠 순례길을 소개한다. 1,400㎞란다. 한국의 올레길도 알고 있다면서 언젠가 기회가 되면 한 번 가보고 싶다고 한다.
할머니가 짊어진 배낭이 꽤 커 보이는데 걸음걸이가 무겁게 느껴지지 않아서, 평소에 걷는 연습을 많이 하셨는가보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며칠 후 ‘신이찌’라는 일본 남자를 만나서 차 한 잔 나누면서 그 비밀을 알게 되었다. ‘가라배낭’이라는 거였다. 속이 텅 빈 ‘가짜’ 배낭을 지고 간다는 말을 듣고 우리는 배꼽을 쥐었다.
세진이 녀석이 오던 길을 되돌아가고 있다. 순례자 증서를 알베르게 놓고 왔다고 한다. 엊그제는 배낭에 매달아 빨래를 말리고 가다가 비싼 셔츠를 잃어버렸다더니 오늘은 또 크리덴셜을 잊고 온 모양이다.
간밤에 비가 오더니 산에는 눈이 쌓였다. 멀리 눈 쌓인 높은 산이 병풍을 이뤘다. 갈색 포도밭과 푸른 밀밭, 그리고 흰 산이 절묘하게 조화를 이룬다. 관개시설이 사방으로 수로를 따라 연결되어 곳곳으로 물을 보내고 있다. 포도 묘목 사이에 하얀 비닐통을 씌워 어린 싹을 기르고 있다. 모든 어린 것들은 저렇게 보호받아야 한다
한 순례객이 다가오더니 셔츠를 흔들면서 “혹시 네 것이 아니냐”며 묻는다. 오던 길에 주었다고 한다. South Africa에서 왔다면서 이름이 ‘헤르민’이라고한다. 만델라를 아느냐고 묻에 잘 안다고 대답했더니 환하게 웃는다. 나도 노벨 평화상을 받은 김대중을 아느냐고 물었더니 고개를 끄덕인다. 세계 도처에서 온 사람들과 얘기를 나누며 걷는다.
달팽이가 신작로를 건너고 있다. 마른 황토길을 기어가는 달팽이가 힘들어 보여서, 무엇보다 사람들의 발길에 밟힐까 싶어 집어서 풀 속으로 던져주었다. 그런데 2㎞쯤 걸어가다 신작로에서 달팽이 껍질을 발견했다. 아까 풀숲으로 던져준 달팽이가 생각났다. 그 녀석도 순례자가 아니었을까. 껍질로 남아있는 이 녀석은 순례길 도중 목이 말라 죽은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걷다가 길을 지나는 달팽이를 또 발견했지만 녀석의 순례길을 방해하는 성 싶어 그냥 두었다.
치마를 입고 가방을 끌고 가는 아주머니가 보인다. 어떻게 저런 차림으로 이 길을 걸어갈 생각을 했을까. 함께 걷는 분은 남편인 모양인데 그는 제대로 준비를 갖추었다. 불란서에서 왔다고 한다. 사람 살아가는 모습이 가지각색이다.
왼쪽으로 골프장 보인다. Ciruena마을을 지나면서 길가 아이를 보듬고 있는 아주머니에게 눈 덮인 산의 이름을 물었다. 산 로렌토 마운틴이라고 한다. 친절하게도 연필을 달라고 하더니 스펠링을 적어준다. 모처럼 영어가 통하는 주민을 만났다.
저만치 앞서 걷는 아내가 뒷걸음으로 언덕을 내려가고 있다. 며칠 전부터 아프기 시작한 무릎이 아직도 낫지 않아 힘들어 한다. 무릎이 좋지 않으면 언덕길을 내려갈 때 저렇게 뒷걸음을 치면 통증을 덜 느낀다고 했다. 매일 오르막 내리막길을 걸어야 하기 때문에 물집이 잡히는 건 다반사이고 무릎이 고장나거나 발 관절이 아파 쉬었다 걷는 사람들이 많다. 며칠씩 쉬어도 좋아지지 않는 경우에는 걷기를 포기하고 돌아가는 수밖에 없다. 함께 출발했던 한국 대학생 중에서도 발 때문에 우리보다 한창 늦게 걸어오는 아이들이 한둘이 아니다.
가파른 고개를 올라가는데 자전거 선수들이 지나가기 시작한다. 울퉁불퉁한 자갈길을 산악자전거를 몰아 씩씩거리며 달려가는 선수들의 등짝에 커다란 번호판이 붙어있다. 선수들이 많은 걸 보니 꽤 큰 대회인 모양이다.
언덕을 넘으니 도시가 멀리 보인다. 오늘의 목적지 산토도밍고다. 성당의 종탑이 뾰쪽하게 솟아있다. 큰 도시는 물론 작은 마을도 대부분 성당이 있다. 옛날에는 성당을 중심으로 마을이 형성되고 운영되었던 모양이다.
도시 입구에 알베르게가 하나 보이는데 정문에 만들어 세운 상징물이 재미있다. 축구공 위에 닭이 올라서서 목청높이 우는 모습이다. 이 나라 사람들이 축구를 얼마나 좋아하는가, 이 도시가 얼마나 닭으로 유명한 지역인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닭과 관련된 전설이 있다. 중세 때 독일에서 온 순례자 가족이 이 도시의 한 여관에서 묵게 되었는데, 여관의 하녀가 그 부부의 아들을 사랑하게 되어 그를 유혹했지만 관심을 끄는데 실패했다. 그러자 앙심을 품은 하녀가 은쟁반을 행랑 속에 감춰 누명을 씌웠고, 청년은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의 부모가 슬픔에 잠긴 채 순례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교수형을 받았던 아들이 밧줄에 매달려 아직 살아있는 것을 발견했다. 도밍고 성인이 그의 다리를 받치고 있었던 것이다. 부모는 곧바로 영주에게 이 사실을 알렸지만 영주는 믿지 않고 비웃으며, “네 아들이 살아있다면 내가 지금 먹고 있는 이 닭도 살아있겠구나”하고 말했다. 그러자 그의 식탁 위에 놓여있던 구워진 닭이 벌떡 일어나 홰를 치며 날아갔다고 한다.
‘현대자동차’ 배너가 건물에 걸려있다. 사무실이 비어있는 걸 보니 입주할 예정인가 보다. 우리 기업들이 저렇게 세계를 누비며 활동하는 모습을 보면 대견스럽고 괜히 어깨가 으쓱해진다. 그리 오래지 않았던 어느 해, 미국의 전자제품상에 들렀는데 삼성 TV가 SONY를 제치고 제일 좋은 자리에 제일 높은 가격표를 붙이고 놓여있었다. 그 모습을 보았을 때의 기억이 살아난다.
자전거를 탄 선수들이 좁은 골목길을 들어서고 있다. 시간차를 두고 선수가 들어올 때마다 골목을 지키는 경찰들이 길을 비켜달라고 호르라기를 분다.
1시 30분 알베르게 도착. 거리에 사람들이 북적거린다. 현대식으로 시설이 잘 되어있다. 부엌시설도 훌륭하다. 함성 소리가 들린다. 창 너머로 광장이 보인다. 시상식을 하는지 쩌렁쩌렁한 마이크 소리와 관중들의 환호성이 들려온다. 행사장인 칼사다 광장이 멀지 않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오늘이 일요일이다. 일요일은 마켓이 문을 열지 않는다고 했다. 그렇지만 혹시 순례자를 위해 문을 연 곳이 있을까 싶어 마켓도 찾아볼 겸 시내 구경을 나섰다. 노천카페에 순례자들이 앉아 맥주 한 잔을 앞에 놓고 목을 축이고 있다.
영암군민신문 yanews@hanmail.net

오늘의 인기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