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까리온(Carrion de los Condes)서 떼라디요스(Terradillos de Tampleions)까지 2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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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19>까리온(Carrion de los Condes)서 떼라디요스(Terradillos de Tampleions)까지 26.7㎞

"힘들고 어려운 상황 온몸으로 겪으며 걸었던 순례자들…과연 인간에게 종교란 무엇일까?"

음악이 울펴퍼진다. 모닝콜이다. 6시다. 음악을 울려 순례자들을 일시에 깨우는 알베르게는 처음 경험한다.
6시50분 출발. 오늘은 17㎞를 가는 동안 마을도 휴게소도 없으니 물을 충분히 준비해야 한다고 안내책자가 말해주고 있다.
마을이 끝나는 지점에 순례자를 돌보아주었다는 병원 건물이 있다. 그리고 허허 벌판이 시작된다. 저렇게 순례자가 걸어가는 길목에 병원을 세워 병을 고쳐주고 먹을 것도 나눠주던 시절이 있었다. 힘들고 어려운 상황을 온몸으로 겪으면서 이 길을 뚜벅뚜벅 걸어갔던 순례자가 끊임없이 있었다는 이야기다. 인간에게 종교란 무엇일까, 하는 근본적인 질문을 하게 된다.
자기가 믿는 신을 위해 목숨까지도 기꺼이 내 던지는 인간. 볼테르가 "신이 없다면 하나 만들어라"고 했다지만, 마음에 드는 신이 없으면 만들어서라도 신을 믿으려 하는 인간. 그 오묘하고 불가해한 인간이라는 짐승은 나도 인간이지만 참 이해하기 힘든 존재다.
순례자들이 둘씩 셋씩 무리를 지어 걸어가고 있다. 해가 떠오른다. 길가에 플라타나스 나무가 줄지어 서 있다. 개 한 마리가 이슬이 마르지 않은 나무그늘 아래서 푹 튀어나온다. 깜짝 놀았다. 뭘 씹어 먹고 있다. 들쥐를 잡아먹었는지 입가에 피가 묻어 있다. 민가가 보이지 않는 이 벌판에 떠돌이 야생견인 모양이다. 개가 순례자 행렬에 끼어 함께 걷기 시작한다. 저 개도 순례중인지 모르겠다.
몇 살이나 되었을까. 검불처럼 가벼워 보이는 노인이 간단한 배낭을 메고 걷고 있다. 말 없이 조용조용 발걸음을 떼어놓는 모습이 바람이 불면 훅, 날아가 버릴 것만 같다. 노인을 뒤로 하고 한참을 걸어가다, 이번에는 절뚝거리며 걷는 사람을 만났다. 성한 사람도 힘든 이 길을 저렇게 불편한 몸을 끌고 걸어가고 있다. 무슨 일이던지 마음먹기에 달렸다.
앞뒤 좌우를 둘러보아도 온통 초록 벌판이다. 멀리 아지랑이가 일렁인다. 초록에 불이 붙었다. 봄비가 다녀 가신 들판에 기름을 부은 듯 초록 불길이 번지고 있다. 바람 한 줄기 건듯 불자 들판이 출렁거리기 시작한다. 초록 물결이 멀리멀리 여울져 간다. 장관이다.
밀이 패고 있다. 저렇게 고개를 내밀고 있는 밀 모가지를 보드라운 털이 감싸고 있다. 저 보드라운 털 끄트머리에 알갱이가 달려있다. 붓처럼 휘어지던 털이 빳빳해지면서 밀이 익기 시작하고, 들판은 푸른색에서 갈색으로 조금씩 조금씩 바뀌어간다. 나락은 익으면 고개를 숙이지만 밀은 머리를 숙이는 일이 없다. 쏟아지는 햇살을 온몸으로 견디며 꼿꼿이 고개를 세우고 익어갈 뿐이다.
밀이 익으면 트렉타가 밀밭을 지나면서 수확을 할 것이다. 내가 농사를 짓던 시절 우리 농촌에는 트렉타가 없었다. 밀 타작을 하던 날이 생각난다. 보리는 베어다가 홀태로 모가지를 따서 말린 다음, 도리께로 두드려 타작을 했다. 그렇지만 밀은 모가지 따는 작업과정을 거치지 않고 베어온 밀단을 나란히 높여놓은 채 말린 다음, 도리께로 두드려서 알곡식을 챙겼다. 참 오래전의 일이 되었다.
40리 길을 걷는 동안 마을이 없다더니 걸어도 걸어도 들판이다. 저 멀리 나무 한 그루가 길가에 서 있다. 혼자 있어 외로워 보인다. 멀리 보이던 나무가 점점 가까워진다. 나무 위에 새 한 마리 앉아 있다. 가지 사이를 포릉 포르릉 날아다니며 무어라 말을 걸어온다. 반갑다. "사막을 걷다가 너무 외로워 뒤로 돌아서 내 발자국을 보며 걸었다"는 시가 생각난다. 새 한 마리가 이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들판 가운데 창고로 보이는 꽤 큰 건물 한 채가 덩그러니 서있다. 담장을 둘러친 넓은 뜰에 퇴비가 가득 쌓여있는데 개 한 마리 철창 틈으로 사람을 바라보며 짖고 있다. 녀석도 많이 외로운가 보다. 두 마리를 기르면 좋을텐데, 하는 생각이 스쳐간다. 새도 개도 혼자서는 외로워 저렇게 말을 걸어온다. 허긴, 여럿이면 외롭지 않다는 주장이 언제나 옳은 것은 아니다. 그나저나 저 놈, 아침밥이나 먹였는지 모르겠다.
혼자서 걷는다. 터벅터벅 걸어가면서 아까 짖어대던 녀석이 옛날 우리 집에서 기르던 진돌이를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진도에서 살 때, 우리집 진돌이는 눈 내리는 밤에도 밤새 토방 앞에 꿈적 않고 앉아 집을 지켰다. 아침이면 머리 위에 쌓인 눈을 부르르 털면서 꼬리를 흔들던 녀석이 눈에 선하다.
중년부부가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다가 멈춘다. 남편의 자전거에 개집을 매달아 데려가는 중인데 녀석이 볼일을 보고 싶어 끙끙댔던 모양이다. 개를 자전거에 태워 세 가족이 이 길을 가고 있다. 풀어놓은 개가 껑충거리며 좋아라고 밀밭을 뛰어다닌다.
끝이 보이지 않는 평원을 걷는 것은 단조롭다. 저 끝이 어디쯤일까. 가도가도 끝나지 않을 성 싶던 그 길을 얼마쯤이나 갔을까. 갑자기 움푹 패인 지대가 나타나더니 아담한 마을이 눈 앞에 보인다.
깔사디아(Calzadilla)마을이다. 움푹 패인 분지에 있어서 멀리서는 보이지 않았나보다. 마을 입구 흙담이 한국의 어느 시골에 온 것처럼 눈에 익다. 흙담은 물론 담 위에 덮어 씌운 낡은 볏집까지도 정겹다. 그러고 보니 이 마을은 흙벽을 발라 지은 집들이 제법 많다. 사방이 들판이어서 다른 지방에 비해 돌을 구하기가 힘이 들었는지 모르겠다.
까페에 들러 요기를 하려는데 동양사람이 보인다. 일본인 아닐까 생각했는데 마침 우리 뒤에 도착한 모도꼬 상이 그를 소개한다. 요꼬하마, 자기와 같은 지방 출신이라고 한다. 이름은 신이찌, 48년생이란다. 작년에 이 길을 걸었는데 올해 또 왔다고 한다. 왜 또 왔냐고 물어도 그냥 웃기만 한다. 영어를 거의 못한다. 모도꼬가 중간에서 통역을 해 준다. 이 길이 좋아서 명년에도 또 올 예정이란다.
다시 걷기 시작한다. 고속도로와 나란히 길이 나 있다. 좀 떨어진 곳에 토굴집이 보인다. 저렇게 토굴처럼 산을 파서 땅 속에 주거지를 만들면 여름에 시원하고 겨울에 따뜻하겠다. 지붕을 이을 필요도 없고, 비가 샐 걱정도 없을 게 아닌가.
길 가운데 돌멩이를 모아 글을 만들어 놓았다. 무슨 뜻일까. 레디고스(Ledigos) 마을 입구에 대형 트렉터가 세워져있다. 밭에 돌이 많아 저렇게 큰 트렉터로 자갈밭을 갈아엎어야 하는가 보다.
밭 가운데로 난 신작로를 걸어간다. 이 길도 비가 오면 꽤나 질척거리겠다. 오늘은 맑은 날, 저렇게 구름이 일렁이는 푸르디 푸른 날. 길섶에 핀 꽃이 곱다 했더니, 노랑나비 한 마리가 어디선가 날아와 길을 안내 한다.
1시50분 떼라디요스(Teradillos)에 도착. 마을에 들어서자 학을 닮은 큰 새 한 마리가 이 마을에 온 것을 환영한다는 듯 머리 위를 빙빙 돌면서 끼욱거린다.
알베르게를 찾아가는 길목에 성당이 보인다. 아까 우리를 환영하던 큰 새가 성당 지붕위에 둥지를 틀고 앉아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다. 저렇게 순례자를 지켜보면서 환영하는 일을 대대로 해오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어떤 메시지를 전해주고 싶어 저 새는 사람들을 저렇게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을까.
알베르게에 도착했다. 독립 템플기사단에 속한 마을이라더니 알베르게 간판이 재미있다. 일찍 도착한 순례객들이 손을 흔들어 인사를 건넨다. 우선 목마른 김에 맥주를 한 잔 마셨다. 꿀맛이다. 마당 화단에 오래된 쟁기가 놓여있는데 한국의 그것과 똑 같다. 여기서도 소를 몰아 쟁기를 갈았던 모양이다. 휴게실에 국제통화를 할 수 있는 공중전화가 있어서 모처럼 딸아이에게 전화를 했다.
마을을 한 바퀴 돌아보았다. 흙담을 쌓아 지은 오래된 집들이 마을의 역사를 말해주고 있다. 허물어가는 집 사립을 가만히 들어다보았다. 사람이 살수 없을 성 싶은데 닭 몇 마리가 발로 흙을 헤집고 있다. 사람이 살고 있다는 증거다. 흙담이 허물어진 그 옆집을 지나는데 컴컴한 골목에서 고양이 한 마리가 낯선 행인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다. 아차하면 덤벼들 태세다. 좌우를 둘러보아도 대낯인데 한 사람도 보이지 않는다. 어느 낯선 행성에 와 있다는 느낌이 든다. 시계를 거슬러 몇 백년 전의 어느 도시에 와 있는지도 모르겠다.
모퉁이를 돌아가니 허물어져가는 건물 흙벽에 한 아이가 공을 치며 놀고 있다. 저렇게 흙벽에 공을 치면 벽이 금방 떨어져 나갈텐데 아이는 노느라 정신이 없다. 그나저나 이런 작은 마을에 아이들이 몇 명이나 될까. 교육은 또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궁금하다.
시냇물이 호수에서 만나듯, 헤어졌던 사람들이 알베르게에서 다시 만나게 된다. 독일인 오토가 아주 반가워한다. 옥상에서 맥주 한 잔 하며 얘기를 나눈다. 올해 61세인데 공장생활을 은퇴하고 평소에 걷고 싶었던 이 길을 나섰다고 한다. 이 친구 영어가 거의 안 되어 어려웠지만 바디랭귀지로 서로 통했다.
어제 만났던 국회의원이라는 분이 합석했다. 독일에서 공부를 했는지 오토의 얘기를 통역해준다. 명함을 건네준다. 정치학 박사, 전(前) 대한민국 국회의원 000이라고 적혀있다. 며칠 전 맥주를 마시던 젊은 여성과 여전히 동행을 하고 있다.
이 길을 걷기 시작한 후로 지금까지 작은 도시에서는 알베르게에서 인터넷을 사용할 수가 없었다. 컴퓨터가 없거나 있더라도 스페인어만 사용해야 하기 때문에 이메일을 보낼 수도 없었고 인터넷 검색을 할 수도 없었다. 뉴스를 듣지 않고 걷는 게 편하기도 했다.
그런데 오늘 빅뉴스라며 김 선생이 박근혜 대통령 방미 소식을 전해주었다. 수행중인 대변인이 업적을 하나 남겼다고 한다. 자초지종을 들어보니 참 어이없는 사건이다. 청와대 대변인이라는 사람이 성추행을 저질렀다고 한다. <다음호에 계속>
영암군민신문 yanew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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