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책에서도 기술했지만, 영암향교의 연혁이 최초로 기재된 책자는 1963년 영암군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 군지에는 영암향교 창설 연대가 두 가지로 적혀 있다.‘사묘(祀廟)’항에서는‘태조 무인년(1398년)에 공자의 문묘를 건립하였다(太祖戊寅年建).’라고 하였고,‘향교사적(鄕校事蹟)’에서는‘고려말 포은 정몽주 선생이 각 군에 향교 창설을 지시할 때 처음 건립되었다고 전한다(此盖高麗末文忠公鄭圃隱先生各郡鄕校創設時施建者也傳云云).’라고 적었다. 그리고 1983년에 영암향교 사무국장 박준섭 선생은 이 군지 뒷부분의 기록을 근거로 ‘고려 말 포은 정몽주 선생의 지시로 각 군에 향교가 설치되었다고 하나, 연대미상(年代未詳)’이라고 1993년 영암향교지에 게재하였다. 정몽주가 창건을 지시하였다는 기록은 없지만 문제 될 게 없었다.
그런데, 1998년 영암군지 편찬자들은 1963년 영암군지나 향교지를 보지 않고‘원래 영암향교의 창설은 1420년(세종 2)에 조령(朝令)과 향내 유림들의 협조로 이루어졌다고 한다.’라고 적었다. 무엇을 근거로 이렇게 썼는지 모르겠지만 이후 영암향교는 1420년에 창설된 것으로 알려졌고, 2022년 영암향교에서는 이를 근거로 영암향교 6백 주년 기념사업비를 건립하기로 하고 박준섭 선생에게 비문을 의뢰하였다. 하지만 영암향교 건립 연도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던 박준섭 선생은 당시 자택을 방문하였던 필자에게 ‘어떻게 생각하는가’고 물었는데 필자는 1963년 영암군지를 참고하는 게 좋겠다고 말씀드렸다. 하지만 1998년 영암군지의 기록을 따르자는 다수 의견에 따라 영암향교 창건 600주년 기념비는 1420년을 근거로 세워지게 되었다.
이후 강진향교의 창설 연도가 1417년임을 알고 있던 일부 유림들은 이 600주년 기념비를 못내 아쉽게 여겼다. 1172년(고려 명종 2년)까지 영암군의 속현이었던 강진군보다 영암군의 향교가 늦게 세워졌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는 것이었고, 이번에 다시 내게 질의를 해온 것이었다.
필자의 의견은 책에 기술한 대로다. 1963년 영암군지 앞부분에 실린‘태조 무인년(1398년)에 공자의 문묘를 건립하였다(太祖戊寅年建).’를 영암향교 창설 연대로 정했으면 한다. 이렇게 하면 보성향교가 1397년이고, 장흥향교가 1398년이므로 인근 향교들과 어느 정도 창설 연대가 맞아들어간다. 더욱이 세종대왕이 1418년 11월 3일에 “향교는 풍속과 교화의 근원으로(중략) 향교를 설치하여 가르침을 권면한 것이 지극하지 않음이 없었는데도(學校風化之源---鄕 勸勉訓誨無所不至)”라고 한 말로 보건대 1420년 이전에 설치된 것은 분명하다. 600주년 기념비를 다시 세우자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 사실만이라도 정확하게 짚고 넘어가자는 뜻이다.
영암향교 역사에 대한 두 번째 논란도 1963년 영암군지에서 비롯되었다.
‘본군의 옛날 향교터는 현재 영암군 동문 밖 역촌인데(중략) 1603년 3월 군시면 초곡리 황정노와 군종면 장암리 문후소의 노력으로 현재의 자리로 옮겨졌다(本郡????鄕校基地現郡東門外驛村是也(중략)卯三月日舊鄕校移建于現在地健設注力郡始面草谷里黄廷老郡終面塲巌里文後素也).’고 적혀 있는데, 이것도 잘못된 기록으로 보인다. 을묘왜변 당시인 1555년 5월 25일, 동문 밖 영암향교에 주둔하고 있던 6천여 왜군이 양달사 의병장이 이끄는 영암의병들에 의해 참살되고 일부 성현들의 위패가 불에 타 버렸다. 어쩔 수 없이 그해 가을 석전대제를 앞두고 전라도관찰사가 어떻게 했으면 좋겠는가를 조정에 문의한 결과 위패를 새로 만들어 잘 봉행하라고 하였다. 하지만 왜구의 피로 더럽혀진 향교가 영 꺼림칙하게 느껴져 영암 유림들은 1556년경에 현재의 자리로 이전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 근거는 전라북도 의병장 김제민(金齊閔 1527~1599)이 1586년 8월 24일 전라도사로 내려왔다가 영암에 들러 지은 것으로 보이는‘영암 향교터를 둘러보며(望靈巖鄕校舊基)’라는 시다. 어려서 영암향교에서 공부한 김제민은 ‘예전에 선생님을 모시고 노닐었던 영암향교/손가락을 꼽아보니 벌써 40년이 되었구나/향교도 이미 옮겨가고 인간사도 변했지만/옛날 노닐던 곳을 둘러보니 눈물이 흐르네(昔陪先子杏壇邊屈指如今四十年廟貌已遷人事變舊遊回首淚潸然).’라고 읊었다. 이 시로 보건대 김제민이 영암향교에서 공부하던 시기는 전라도사로 부임하기 40여 년 전인 1546년 경이고, 향교를 이미 옮겼다고 하였으므로 영암향교는 1555년 을묘왜변 직후에 옮겨졌음을 추측할 수 있다. 1963년 영암군지에 적힌 1603년에는 문후소, 황정노가 정유재란 때 소실된 향교를 중창한 것으로 보인다.
영암군청과 성쇠(盛衰)를 함께 해온 영암향교, 창설과 이전 관련 역사를 제대로 알아야만 영암군 역사의 큰 물줄기를 제대로 파악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