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암향교(전교 최금렬)는 1984년(고종 31)갑오개혁 이후 과거제도가 폐지되고 학제를 개편함에 따라 교육기관의 역할이 없어지면서 자연스럽게 강학기능을 상실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인문학이 퇴보하게 되고, 이는 정신과 인성의 고갈로 이어져 사회 불평등은 심화되고 정신적 건강문제를 증가시키고 있다.
이에 향교의 열악한 재정이지만 각자의 교양을 길러 우리 삶의 질과 품격을 높여보고자 군(郡)의 지원을 받아 ‘인문학 강좌(유교경전)’와 ‘청소년 예절교실’을 운영하고 있다. 또 성균관에서 주관하는 ‘유교 활성화 사업’에 응모하여 ‘유교아카데미’와 ‘청소년 서원스테이’를 지난 2017년부터 현재까지 운영하고 있다.
한편, 향교 유림회관에서는 서예교실(경서학원)과 가야금 교실을 운영하고 있으며, 전통문화 발전계승과 미풍양속을 이어 가고자 전통 혼례와 청소년 성년식인 관례(冠禮)와 계례(笄禮)를 군과 교육청의 지원을 받아 추진할 계획이다. 그런가 하면, 향교의 공간을 문화 체험 관광 터로 개발하여 유교문화를 친숙하게 배우고 느낄 수 있도록 현대적 감각을 살려 향교의 기능을 새롭게 복원시키고자 힘쓰고 있다.
향교는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있었던 국립 지방 교육기관으로 각 지방관청의 관할하에 두어 대도호부(大都護府)와 목(牧)에는 각 90명, 도호부(都護府)에는 70명, 군(郡)에는 50명, 현(縣)에는 30명의 학생을 수용하도록 하였다. 직원으로는 종6품의 교수와 정9품의 훈도(訓導) 각 1인, 소군(小郡)에는 훈도만을 두도록 경국대전에 규정하였다. 독서와 일과(日課)를 수령이 매월 관찰사(觀察使)에게 보고하여 우수한 교관에게는 호역(戶役)을 양감(量減)하여 주었다.
향교에는 정부에서 학전(學田)을 지급하여 그 수세(收稅)로써 비용을 충당케 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지방민으로부터 과다 징수 또는 매수 등으로 인해 많은 전지를 소유한 곳도 적지 않았다.
이들 향교는 중앙의 사학(四學 : 동학, 서학, 중학, 남학)과 같아서 향교 입적자에게만 과거 응시의 자격이 주어졌다. 소과에 입격하면 생원과 진사의 칭호를 받고 성균관에 입학하여 수학할 자격이 주어졌으며, 대과(문과)에 급제하여 관리의 길로 나갈 수 있었다.
향교는 1911년 조선총독부령에 따라 문묘 직원을 명예직으로 두어 부윤(府尹)이나 군수(郡守)의 감독하에 두고 문묘(文廟)를 지키고 서무(庶務)에 종사하게 하였다. 학전 등의 향교 재산은 대한제국 학부(學部)의 소관으로, 1900년(융희 4년) 4월에 ‘향교재산관리규정’을 정하여 부윤, 군수 등이 관장토록 하였으며, 그 수입은 부(府)나 군(郡)의 공립학교나 지정하는 학교의 경비, 또는 문묘의 수리비나 향사비로 충당케 하였다.
국격(國格)과 교권(敎權)이 추락하고 지역이 소멸하고 있는 작금의 현실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공맹(孔孟) 사상과 유학 전통의 회복이 절실하다. 그 최우선 과제인 향교의 강학기능(講學技能)을 되살리기 위해서는 관(官)과 지역유림의 관심과 지원이 절실한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