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정 국사봉은 호남의병 전적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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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금정 국사봉은 호남의병 전적지

(上)호남의병과 영암 국사봉

6개군 인접한 항전 유리한 지세
진터골에 호남의병 사령부 설치
관측소·진지 구축 일제에 항거
호국보훈의 달 6월을 맞아 국가의 존립을 위해 희생한 순국선열들의 숭고한 애국·애족정신을 다시 생각케 한다. 이와 때를 같이해 영암지역에서는 한말 국권회복을 위해 일경과 투쟁을 펼치다 수천명이 순국한 호남의병들의 숭고한 정신을 계승하고자 기념사업회를 조직하고 의병의 발굴, 추모와 '호남의병史' 책자 발간, 의병기념관 건립을 위한 노력이 펼쳐지고 있다. (사)호남의병항일투쟁기념사업회(이사장 조생환)가 발간을 준비하고 있는 책자 '호남의병史'의 자료를 토대로 국사봉을 중심으로한 영암의병들의 활동상을 살펴본다. 그들의 숭고한 정신을 선양하고 민족정기를 바로세워 지역사회의 자긍심 고취에 일조하고자 한다. /편집자주
■호남의병의 태동
1895년(고종32) 을미년 명성황후 시해사변 직후 김홍집 내각에 의해 단발령이 시행되자 전라도지방에서는 유림을 중심으로 나라를 구원하자는 여론이 비등해지면서 호남 각지에서 의병이 봉기했다. 1차, 2차, 3차에 걸쳐 봉기한 호남의병의 수는 1천500여명에 달한다.
1909년 순종의 의병해산령과 일제의 의병소탕을 목적으로한 남도 대토벌작전으로 호남의병이 전멸할 때까지 보성, 능주, 장흥, 강진, 영암 등 전남 중부지역의 호남창의소 의진를 비롯해 광양, 순천 등 전남 동부지역, 그리고 장성, 영광, 광주, 나주, 함평 등 전남 서북부지역의 호남창의회맹소 의진, 또 전남 북부지역, 전북 동북부지역, 전북 중부지역의 의병들이 일경과 일군을 상대로 치열한 토왜전을 펼치며 결사항전했다.
각지에서 봉기한 의병들을 결집하고 토왜전을 펼쳤던 호남지방의 대표적 의병장들은 송사(松沙) 기우만(장성)과 성제(省薺) 기삼연(장성), 고광순(담양), 심남일(영암), 박평남(영암), 안계홍, 임창모, 백낙구, 김태원, 조경환, 전해산, 양진여, 유병기, 문태서, 양한규, 이석용 등이다.
단발령이 강행되자 장성의 대유학자 노사 기정진의 손자인 송사(松沙) 기우만은 각 고을에 통문을 보내 토왜 할것을 호소하여 건양 원년(1896년) 2월 각처에서 의병들이 봉기하기 시작했고, 3월에 기우만은 광주 향교에서 의병 모의 규칙을 정하고 전략을 논의하자 매일같이 모여든 의병의 수는 인산인해를 이뤘다.
이무렵 나주에서는 단발령에 결사반대하는 의병들(민중과 양민)이 일어나 강제단발에 앞장섰던 참사관 안종수를 처단함으로서 조정과 관현의 간담을 서늘케 했다.
■영암의병 봉기
이에 크게 자극받은 영암의 유림들은 구림대동계와 영암열락제 학생들을 동원하여 총사에 최이익, 부사에 신종봉, 선봉 조태화를 추대하고, ‘단발령 결사반대, 국모를 죽인 왜놈 물러가라’는 기치를 높이들고 관아를 협공하니 정원성 군수 이하 모든 관리들이 도피했다.
이날 참여했던 의병들은 130여명에 달했다. 선봉장 조태화는 훗날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에도 굴하지 않고 항전을 다짐하며 20일 만에 석방됐다.
당시 봉기했던 인물들은 이장현, 조영환, 김영환, 문학이, 이종림, 최관묵, 최연산, 문규정, 문규환, 최기성, 조의환, 김석신 등 여명에 달했다.(호남의병항일투쟁기념사업회 자료)
■의병활동의 중심지 국사봉
한말 단달령을 계기로 전국 각처에서 봉기한 의병들은 1905년 을사조약(2차 의병)과 헤이그 밀사사건과 고종 퇴위, 군대해산 등을 계기로(3차 의병) 또 다시 우후죽순처럼 일어났다.
2차, 3차 의병은 호남과 전남지역 의병활동이 가장 활발했고, 전남 의병들이 그 중심을 이뤘다. 특히 2차 의병 봉기를 맞아 한층 조직화된 호남지역의 의병본부가 금정면 국사봉(덕룡산) 진터골에 설치 되어 호남의병의 집결지이자 사령부가 됐다.
이러한 배경은 일본군의 남도 대토벌작전의 경로가 일차적으로 북방에서 시작하여 점차 남하하여 목포 근해로부터 내륙으로 향하고 있었기 때문이며, 국사봉의 험악한 산세는 천혜의 요새로서 은거와 항전에 적합한 곳으로 투쟁의 본거지가 됐다.
또한 금정면은 나주, 화순, 장흥, 강진, 보성, 영암 등 6개군에 인접하고 접근이 용이한 지리적 조건을 갖추고 있어 재난이 있을 때마다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장기전에 유리한 지세를 갖추고 있다.
국사봉은 백두대간을 따라 심산유곡이 아름다운 산세로 쌍계사를 비롯하여 19개 암자가 있었으며, 1906년부터 의병들이 주둔하며 일본군 동향 관측과 의병들에게 수신호를 보내는 등 지휘본부 역할을 했다.
■국사봉에 모인 의병과 심남일 총대장
도대장 이백리와 대장 양회일이 중심이 된 의병부대는 보성, 능주, 강진, 영암지역의 유림 중심의 의병부대로 700여명 규모였다. 또 덕진면 백계리 출신 박평남이 나주의병장 박민홍이 순국하자 독립의진을 형성하고 1908년 영암으로 진출한 심남일 의진과 합진하여 국사봉(진터골)에 주둔했다.
심남일(沈南一 1871~1910)은 1907년 후반 전남 서부지역을 중심으로 활동 중이던 호남창의회맹소에 가담해 활동하다(함평 의병장), 1908년 봄을 지나면서 기삼연과 김태원 김율 등의 의병장이 잇달아 순국하자, 선생은 위의 격문을 사방에 보내어 흩어진 의병들을 다시 불러 모아 영암 박평남과 합류해 금정면 국사봉(고인동)에 주둔했다.
총대장 심남일은 함평군 월하 출신으로 전해산과 최익현의 제자로서 학문이 풍부하고 병법에 능했다. 심남일이 의병 100여명을 데리고 합세하자 국사봉에 주둔한 의병수는 600여명이 넘었고, 각 의병장들은 심남일을 총대장으로 임명하고 3년여의 긴 시간 항전을 펼치게 된다.
심남일은 1909년 10월 9일 능주 충치에서 은거하다 일본군에 체포되어 대구형무소에서 혹독한 고문을 당한 후 사형됐다.
그에 앞서 1909년 7월 21일 심남일은 부대를 해산하고 국사봉(고인동)을 떠나며 다음과 같은 시를 읊었다.
가을바람 쓸쓸한데 서로 울며 이별할제/
고인 산 앞에는 말도 가길 싫어하네/
왜적들을 소탕할 날 오고야 말것이니/
삼년동안 사생동고 결코 헛되지 않으리

/변중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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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조 요 한 이사장
(사)호남의병사 항일투쟁 기념사업회 이사장
전적지 발굴·의병사 편찬 등
숭고한 정신 추모·선양 할터
“호남 의병은 총칼 앞에서도 굴하지 않고 목숨을 바쳐 국권회복과 민족자존을 위해 싸운 가장 용맹스런 의병이었습니다. 그들의 숭고한 정신을 추모, 선양하고 살신성인의 애국애족 정신과 민족정신을 계승발전시키고자 합니다”
조요한(82세) 호남의병항일투쟁 기념사업회 이사장은 “의병사의 중심에 기록되어야할 호남의병사는 아직도 미완의 역사로 후예들의 정확한 기록을 기다리고 있다”며 기념사업회의 목적이 여기에 있다고 밝히고 “금정면 일대 의병사를 발굴해 역사의 현장으로 성역화사업을 계획하고 있다”고 말했다.
조 이사장은 또 “기념사업회는 물질만능시대에 옛 것을 찾고 충, 효, 애를 근본으로 삼아 국사봉의 정신을 계승해 청소년들에게 교훈이 될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는 각오도 밝혔다.
조 이사장이 밝힌 추모·기념사업은 의병들 시신발굴을 비롯해 의병추모공원 조성, 청소년 수련장을 겸한 기념관 건립, 의병탑 건립, 호남의병사 책자 발간 등이다.
기념사업회는 현재까지 파악한 영암출신 의병은 240여명이나 되지만, 사료 빈약, 행적 추적, 발굴에 어려움 겪고 있으며, 세월의 흐름속에 혼백마저 소멸되어 가고 있는 실정이다.
조 이사장은 “금정 국사봉은 한말 의병들의 사령부이자 전적지”라며 “지역민들이 국사봉의 정신을 높이 숭앙하고 자긍심을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기념사업회는 3년전 결성, 현재 임원 5명, 150여명이 활동하고 있다.
변중섭 기자 jusby@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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