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산은 한국 최초의 해외특파원(조선일보 특파원)으로 1920년대의 소련을 시찰했고 조선일보특파원, 논설위원, 전 조선공산당 당수, 동아일보 편집국장, 주필 등을 역임했다. 신간회 조직, 제3차 공산당사건, 일장기말살사건, 흥업구락부사건, 조선어학회사건 등을 주동하는 등 국내에서는 가장 격렬한 항일투쟁에 참여, 8년 동안의 감옥생활과 9년 동안의 연금생활을 했다.
일제 때 국내에서 가장 용기 있게 대항하고 가장 격렬하게 투쟁해 온 낭산은 김창숙 선생과 양대 산맥을 이룬 항일세력이었으며 재야세력의 제1인자로 일제가 가장 경계하고 감시하는 요시찰 대상 제1호였다.
해방이 되자 일제는 낭산에게 정권인수를 제의했으나 단호하게 거절했다. 이 일화에서 보여주듯 낭산은 국민들로부터 인기와 신망을 한 몸에 받는 인물이자 국내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인물이었다.
낭산은 한민당 부당수 겸 선전부장으로 있으면서 제헌국회의원, 헌법기초위원이 되어 직접 대한민국의 헌법을 작성했고 이승만 대통령을 도와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 가장 큰 공훈을 세운 건국의 원훈이다.
한국전쟁 당시에는 내무장관 조병옥 박사와 더불어 대구사수의 대공을 세웠으며 1·4후퇴 때 법무장관으로서 안전한 철수를 위한 계획을 입안하기도 했다.
5·16 군사 쿠데타가 일어나자 낭산은 80세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7차에 걸쳐 군사정권세력을 향해 폭탄연설을 하는 등 군사정권을 붕괴 직전까지 몰아붙이기도 했다.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과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수령했다.
낭산의 80 평생은 곧 우리나라의 항일투쟁사요, 건국의 역사이자, 반공·반독재의 투쟁사요 한국의 정치사이며 근대사로 평가받는다.
□ 낭산기념관 개관하기까지
기념사업회 창립…군 적극적 의지 돋보여
낭산기념관은 지난 2009년1월29일 ‘낭산 김준연 선생 기념사업회’가 창립하면서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이날 창립총회에는 이철승 대한민국헌정회장과 허경만, 이환의, 전석홍 전 의원 등 정계 인사, 이종대 재경영암군향우회장을 비롯한 향우회원, 김일태 군수, 낭산 선생의 3녀인 김자선(84) 여사를 비롯한 유족 등 200여명이 참석했다. 이날 총회에서는 유인학 전 의원이 기념사업회장에, 김희규 전 문화원장이 상임부회장에 선출됐다.
이 자리에서 김일태 군수는 “낭산 선생은 영암이 낳은 근세 최대의 정치지도자이며 항일애국지사로 조국의 광복과 대한민국 건국의 초석을 다진 분”이라며 “선생의 업적을 널리 기리고 자라나는 후손들에게 귀감을 보여주기 위해 기념사업을 추진하게 됐다”고 밝혔다.
특히 김 군수는 “선생께서 태어나신 영암읍 교동리 일원에 생가를 복원하고 기념관과 행랑체등을 건립할 계획”이라며 “사업이 완료되면 선생의 민족정기를 선양하는 역사교육장으로 활용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에 따라 군은 지난 2009년12월 낭산 선생의 생가 터인 영암읍 교동리 94번지 일원 1만7천481㎡의 부지에 총사업비 40억원을 투입해 공사에 착수, 지난 2011년11월 안채 37.44㎡와 사랑채 38.61㎡ 등 생가 2동 복원과, 전시관(457.87㎡), 사당(29.7㎡), 삼문(14.38㎡) 등의 건축을 마무리했다. 또 영암지역 각 문중들로부터 헌수 받은 조경 수목으로 꾸며진 ‘문중헌수공원’도 조성했다.
사업 준공이 지연된 것은 낭산 김준연 선생 생가 복원사업이 사당 건립 없이 ‘반쪽‘ 추진되고 있다는 본보의 보도<2011년4월15일자>와 관련해 군이 사당 건립을 위한 사업비 3억원을 추경예산에 편성, 보완공사에 나선 때문이다.
이춘성 기자 yanews@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