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왕인문화축제 왕인박사 학술강연회 주요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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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왕인문화축제 왕인박사 학술강연회 주요내용

‘2014 왕인문화축제’의 학술회의 프로그램인 ‘왕인박사 학술강연회(Wangin Symposium)’가 지난 4월4일 왕인박사유적지 내 영월관 2층에서 ‘왕인박사에 대한 교육의 현황과 개선방향’이라는 주제로 열렸다.
군과 (사)왕인박사현창협회(회장 전석홍), 한일관계사학회(회장 정성일 광주여대 교수)가 주최하고 왕인문화연구소(소장 박광순)가 주관한 이번 학술강연회에서는 박남수 국사편찬위원회 연구관이 ‘한국의 역사서와 연구물에 그려진 왕인박사’, 나행주 대진대 교수가 ‘일본의 역사서와 연구물에 그려진 왕인박사’, 박해현 금호고 교사가 ‘한국의 교과서에 그려진 왕인박사’, 김선희 동국대 강사(일본 시마네현립대학 객원교수)가 ‘일본의 교과서에 그려진 왕인박사’ 등에 대해 각각 주제발표를 했다. 이들 주제발표 내용을 간추렸다. <편집자註>
■ ‘한국의 역사서와 연구물에 그려진 왕인박사’
“渡日시점 논어·천자문의 계통 왕인전승 등 보완해야”
왕인박사의 사적은 우리의 고대 역사서에는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다만 일본의 ‘고사기’와 ‘일본서기’, ‘속일본기’ 등의 사서에만 전할 뿐이다.
이처럼 왕인박사의 사적이 일본 측 기록에만 전하는 것은 문자의 전래가 당시 일본 사회에 매우 큰 충격으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일 것이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박사 고흥(高興)이 백제에 문자를 전하여 서기(書記)를 지을 수 있게 되었다고 기록한 것도 같은 맥락이라고 여겨진다.
우리 역사서에 왕인박사의 이름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임진왜란을 거치고 난 이후였다. 남용익의 ‘부상록’, 신유한의 ‘해유록’, 조엄의 ‘해사일기’, 이덕무의 ‘청장관전서’,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 이유원의 ‘임하필기’, 김정희의 ‘완당집’, 한치윤의 ‘해동역사’등을 들 수 있다.
근대에 들어서는 수신사들의 견문록을 통해 일본인들의 왕인에 대한 인식, 그리고 일제 강점기의 각종 잡지류의 논설과 신문 등에 실린 왕인에 대한 인식과 정치적 이용 상황을 살필 수 있다.
우리 역사서에 왕인 관련 기록이 임진왜란 이후에 나타난 것은 조선과 일본의 통교에 대한 협의과정에서 일본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조선통신사들이 일본 학계의 왕인연구결과를 소개한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들 기록에는 왕인이 일본에 파견된 시기, 일본에 전한 서책 등에 있어서 상당한 차이가 있다. 여기에는 일본을 견문할 당시에 잘못된 정보를 전해들은 탓도 있으나 견문할 당시 일본 학계의 인식과 그에 대한 보고자의 인식, 무엇보다 서로 다른 내용을 전하는 일본 측 기록에 대한 해석차이로 인한 것이다. 이러한 정보는 근대 이후 연구자들에게 그대로 답습되었다.
따라서 이제는 우리 역사서와 연구물에 비친 왕인박사의 실상을 그려보고, 우리 학계가 어떤 방향으로 왕인박사를 연구해야할지 고민해야 한다.
첫째로는 왕인의 일본 파견 시점에 대한 문헌학적 재검토가 필요하다.
둘째로는 왕인이 전했다는 논어와 천자문의 전래에 대한 연구는 대체로 왕인이 언제 일본에 갔느냐에 따라 상황 논리적으로 전개되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왕인이 전했다는 논어와 천자문의 계통을 살펴야 한다.
셋째로는 왕인의 출자와 관련해 왕인 전승에 대한 광범위하고 세밀한 자료조사가 필요하다. 왕인의 어머니가 오이를 먹고 왕인을 낳았다는 전승은 도선국사의 전승과 동일하다. 왕인 전승을 보완할 필요가 있다.
넷째로는 백제의 고대국가 성장과정에서 영산강이 차지하는 위치의 문제에 대한 규명이 필요하다. 왕인박사 연구는 보다 더 세부적인 연구와 함께 백제사, 나아가 한국 고대국가의 형성과 발전, 그리고 고대 동아시아 교류사라는 폭넓은 시각에서 왕인문제를 다룰 필요가 있다.
■ ‘일본의 역사서와 연구물에 그려진 왕인박사’
“화이씨 일족은 재지호족 아닌 왕인 일족”
일본 사상의 인물 가운데 왕인박사의 경우만큼 사적(문헌상)으로 커다란 족적을 남긴 인물은 흔치않다. 동아시아의 동쪽 가장자리에 위치한 미개의 일본열도에 ‘미개에서 문명으로’의 전환점에 바로 왕인박사가 위치한다. 무엇보다도 역사시대의 시작이자 문명화에 필수불가결한 요소인 천자문으로 대표, 상징되는 중국의 한자문화를 전한 문자문화의 전수자가 바로 왕인박사이기 때문이다.
또한 고도의 정치철학, 지배이념이자 학문 사상인 논어로 대표되는 유교, 유학과 학문의 시조, 왜국의 왕자, 왕재교육을 담당한 학자, 교육자, 일본문학(와카)의 개조라 할 수 있는 와카(和歌)의 아버지, 일본 고대의 최고 지식인, 교양인이자 전 근대 일본사상의 현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 추앙되는 등 실로 다종다양한 평가를 받는 인물이 왕인박사이다.
이렇듯 왕인박사에 관한 다양하고 높은 평가는 일본의 고전 특히 일본 최초의 역사기록인 ‘고사기’와 일본 최초의 관찬사서인 ‘일본서기’를 비롯한 각종 문헌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
왕인 관련 문헌 가운데 근세 이전에 출현한 고대문헌을 중심으로 왕인 후예씨족, 즉 왕인에서 비롯되어 점차 분기 분파된 후예씨족을 확인한 결과 황별 화이씨 일족인 眞野씨가 백제계(왕인 후예)인 民씨와 동족이라는 점, 번별 백제계(왕인 후예) 高志씨가 황별 화이씨=大春日씨와 동족이라는 점 등에서 왕인 일족(高志씨, 民씨)과 화이씨 일족(眞野씨, 大春日씨)은 동족이다. 결국 양자는 동일 실체로서 화이씨가 재지호족이 아니라 백제에서 건너간 왕인박사 집안임은 명백하다 할 것이다.
■ ‘한국의 교과서에 그려진 왕인박사’
“2014년 검인정 교과서 8종 중 3종은 누락”
왕인에 대한 우리 교과서의 서술은 대한제국 시대 현채가 쓴 ‘중등교과 동국사략’(1906년)에 처음 실려 있다. 이 책은 종래 편년체 사서를 탈피해 주제별 영역별로 서술하는 방법을 도입한 점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국사교과서라고 할 수 있다.
하야시가 1892년에 쓴 ‘조선사’ 7권을 역술(譯述)한 이 책에서 현채는 논어와 더불어 헌상(獻上)된 대상으로 분류해 왕인 渡日의 역사적 의의를 평가하지 않은 하야시와는 달리 “박사 왕인으로 하여금 논어와 천자문을 가지고 일본에 가도록 하니 일본의 문화가 이로부터 시행되었다”고 하며 일본 문화 발전의 주체로 인식하고 있다.
현채의 이러한 서술 의도는 ‘중등교과 동국사략’에 이어 바로 서술된 초등교과서인 ‘유년필독’에도 이어져 우리나라가 일본보다 선진국이라고 밝히고 있다.
‘유년필독’과 거의 같은 시기에 나온 ‘초등대한역사’, ‘초등본국역사’ 등 초등학교 교과서에도 왕인 관련 서술들이 들어 있다.
이렇게 보면 대한제국기의 근대적 성격의 역사교과서에는 초등 중등을 막론하고 왕인박사가 도일하여 일본에 문자와 유학을 전하여 문화가 시작되었다고 서술되어 있다. 이것은 역사적 영웅이나 위인을 부각시켜 나라의 독립을 지키고자 하는 애국계몽기의 애국심의 발로다.
해방 후 국사교과서는 중등용 ‘조선역사’(1946년)에 수록되어 있다. 그러나 미군정기의 ‘국사교본’(1946년)에는 일본문화에 끼친 백제의 영향을 강조했을 뿐 왕인박사와 아직기의 도일은 생략되어 있다. 이는 제1차 교육과정이 나온 1954년 무렵에 서술된 교과서에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1968년 출판된 교과서를 보면 왕인 도일을 기술한 교과서와 누락한 교과서가 있어 모든 교과서가 왕인 관련 사실을 기술한 것 같지는 않다. 이런 양상은 1973년 출판된 교과서에도 그대로 나타난다. 파악한 3종은 도일사실이 서술되어 있으나 1종은 누락되어 있다. 어쨌든 1968년도와 1973년에 간행된 검인정 교과서 가운데 상당수는 왕인 도일 사실을 기술하고 있다.
국사교육이 강화된 1974년 제3차 교육과정에서 국사교과가 독립과목으로 되고 국사교과서가 국정으로 전환한다. 이 때 중·고교 교과서에 왕인의 도일 사실이 수록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중학교의 경우 2002년 국정교과서에 누락되었다가 2011년 검인정교과서 때 다시 기술하기 시작했다. 고교는 2011년 검인정체제로 바뀌자마자 한국사 검인정교과서 6종 모두 누락됐다. 그러다 2014년 검인정 한국사 교과서 8종 가운데 5종에는 왕인 도일 사실이 들어있고 3종은 전혀 언급이 없이 누락되어 있다. 게다가 지학사는 아직 제대로 검증되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설사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일본에 천자문과 논어를 전해 일본의 고대문화를 일으킨 왕인박사와 비교도 되지 않는 인물인 ‘미마지’ 관련 사실을 거의 한쪽 가까이 다루고 있어 충격이다. 또 일부 교과서는 ‘삼국유사’ 설화인 ‘연오랑 세오녀’를 언급하며 도래인에 대해 한쪽을 할애해 서술을 하면서도 대표적인 도래인인 왕인박사의 언급을 전혀하지 않고 있는 것은 범상히 넘길 수 없다고 본다.
초등학교 사회의 경우 성왕 때 일본에 불교를 전해준 사실을 언급하며 아직기와 왕인을 서술함으로써 기술의 순서가 잘못되어 있다. 이는 초등학생들에게 잘못된 역사인식을 심어줄 염려가 있다.
2013년도 수능에 왕인박사 문제가 출제된 것은 그나마 위안이나 장보고의 경우 점차 교과서의 비중이 강조되는 것은 장보고기념사업회가 꾸준히 학술대회를 통해 연구 성과를 축적하고 현장교사들에게 답사기회를 꾸준히 제공한 결과물이라 생각한다.
왕인문화연구소를 중심으로 체계적인 연구가 이뤄지고 있는 점은 다행이나 그동안 소홀했던 왕인 후예를 중심으로 한 연구도 활발히 이뤄져 이 내용이 교과서에 실릴 수 있도록 해야 한다.
■ ‘일본의 교과서에 그려진 왕인박사’
“2000년대 초등교과서 기술 전무 疏略 경향 뚜렷”
메이지기 교과서에 왕인박사는 수사(修士) 또는 학자로 칭해진다. 논어 천자문을 전한 사실과 천황이 불렀다거나 황자의 스승이 되었다는 내용도 담고 있다.
다이쇼기 교과서에는 한반도가 일본의 속국이었다는 표현이 등장한다. 왕인 관련 서술이 보이지 않는 교과서도 등장한다. 박사보다 학자라는 표현이 더 많이 쓰이고 있다.
쇼와시대는 속국이라는 표현이 다시 등장하고 왕인을 학자로 칭한다. 왕인박사 관련 서술은 점차 왕인의 자손이 일본에 뿌리내리는 점이 강조되는 등 일본에의 귀속을 강조한다.
패전 후인 1950년대 이후 교과서는 한학 전래의 시초로 박사 왕인을 칭하는 교과서도 있으나 70년 이후 교과서는 왕인박사 관련 서술이 있는 응신천황 대의 기사의 진위가 불명하다고 기술하거나 아예 서술이 생략되어 있다. 그러나 도래인의 역할은 중시되고 있다.
1990년대 이후 교과서는 도래인의 역할은 설명되어 있으나 왕인박사 관련 서술은 본문에서 다루지 않고 각주에서 짧은 설명이 되는 등 소략해가는 경향이 뚜렷하다. 우익교과서에는 귀화인이라는 표현과 함께 ‘한자를 전한 왕인’이라는 설명이 나오며, 왕인박사 관련 서술이 보이는 교과서는 桐原書店의 교과서가 유일하다. 각주에서라도 백제의 왕인이 논어와 천자문을 전했다는 서술을 싣고 있는 교과서는 明星社 교과서다. 또 2000년대 초등 교과서에는 관련 기술이 없다.
이춘성 기자 yanew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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