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은 항상 고향에 두고 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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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은 항상 고향에 두고 살았습니다"

박화인 재경영암읍향우회장

30대에 상경…성실함으로 ‘자수성가’
고향 행사 때마다 물심양면으로 지원
“출향기업인 고향발전 위해 투자해야”
30대 초반 고향을 떠나 맨손으로 자신의 삶을 개척했고 그의 인생과 재력에 있어서 어느정도 큰 위업을 쌓은 재경영암읍향우회 박화인(64) 회장.
월출산의 전경이 시원스럽게 펼쳐 보이는 영암읍 춘양리에 있는 전망 좋은 아파트에서 그를 만났다.

“타향에 살면서도 마음은 언제나 고향에 두고 살았습니다”

매년 4~5 차례 고향을 찾는 박 회장은 “고향을 떠나 있어도 한시도 고향을 잊지 않았고, 언젠가는 꼭 고향에 돌아와 살겠다는 생각을 품고 있었다”면서 “고향을 찾을 때마다 항상 포근하고 따뜻함을 느낀다”고 소회를 밝혔다.

그가 기자에게 건넨 명함 속의 직함은 ‘북악스카이웨이 팔각정공원 회장’, ‘한서개발주식회사 회장’, ‘한국방송통신대학교 발전후원회 회장’이었지만 그보다도 더욱 소중하고 가치있는 직함이 따로 있을듯 싶었다. 그것은 ‘애향인 박화인’.

박 회장은 재경영암읍향우회장을 5년째 역임하면서 고향발전을 위해 남다른 노력과 애향심을 쏟았다. 고향 행사 때마다 물심양면으로 지원을 아끼지 않았고, 고향 선후배들을 만나면 항상 따뜻한 마음과 정을 베풀었다.

영암읍 춘양리에서 출생한 박 회장은 영암초등학교와 영암고등학교를 졸업했으며 잠시 금정면사무소에 근무했던 적이 있었다.

30여년 전 30대 초반에 상경해 전기설비 업체를 경영하며 타향에서 자신의 삶을 개척했다 . 어려운 환경속에서도 노부모를 모시고 2남 3녀 자녀를 교육시키느라 남 못지않은 고생도 했다.

그는 내로라는 쟁쟁한 업체들을 따돌리면서 전기공사를 따내는 특출한 사업수완을 발휘하면서 많은 돈을 벌었다. 돈을 버는 과정은 그리 순탄치만은 않았지만 항상 꿈과 희망을 잃지 않았다고 했다.

그는 “어른을 공경하고 형제를 사랑하자, 자기 일은 자기 스스로 하자”라는 문구를 생활신조와 좌우명으로 삼고, 평생 말없이 노력하며 성실한 삶을 살아왔다. 자수성가(自手成家)라는 말을 그에게 인용할 수 있었다.

“큰 돈은 못벌었지만 편안한 노후를 보낼 수 있을 만큼의 재산을 모았다”고 겸손하게 말하는 박 회장. “때가 되면 고향과 고향사람들을 위해 더욱 많이 봉사할 수 있는 기회를 갖고 싶다”고 피력했다.

박 회장은 재력 외에도 자신의 삶을 위한 또다른 투자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사업하느라 바쁜 와중에서도 그는 방송통신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했고 현재 방송통신대학교 발전후원회장을 맡고 있으며, 한양대학교 법학과 석사과정 졸업을 앞두고 있다.

그는 또 서울 북부검찰청 범죄예방선도위원을 역임하며 보이지 않는 곳에서 불우청소년을 돕고 교화사업에 힘써 국무총리 상과 검찰총장 표창, 치안본부장 표창 등을 수상하기도 했다.

그는 애향인으로서 고향 영암 발전을 위한 각별한 관심과 소견도 갖고 있었다. “영암이 ‘머무는 광광지’가 돼야하는데 그렇지 못한것이 아쉽다”며 “영암의 새로운 관광인프라 구축 등 많은 변화가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또 “읍 소재지는 계획적인 발전 프로젝트가 필요하다”며 “아름다운 氣고장의 이미지를 한층 부각시킬 수 있어야 한다”고 밝혔다.

박 회장은 한때 ‘달도지회’ 회장을 맡아 고향주민을 위한 봉사활동에 전력하기도 했으며 ‘영암읍민의 날’ 행사를 태동시키는데도 큰 몫을 했다.

향우회를 통한 ‘애향 운동’에 큰 뜻을 두고 있는 그는 “출향 기업인들이 고향발전을 위해서 투자 해야하며, 출향인들이 애향심을 갖을 수 있도록 앞장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박 회장은 마지막으로 “고향을 떠나 봐야 더욱 고향의 소중함을 안다”며 “항상 포근한 고향, 꼭 돌아와 고향에서 사는 꿈을 실현하겠다”고 밝혔다.

/변중섭 기자




변중섭 기자 jusby@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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