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포계 창설은 鄕射 의미를 본받아 활쏘기를 권장하여 때때로 익히도록 하기 위함이다”
지나간 두 번의 정사년(1797, 1857)에 관가(官家)에서 향인(鄕人)들을 격려하고, 음우(陰雨)를 염려한 나머지 출연금을 내어 주어 사포계를 창설한 것은 향사(鄕射)의 의미를 본받아 활쏘기를 권장하여 때때로 익히도록 하기 위함이다. 사포계를 지켜온 것은 곧 향사(鄕射)를 위한 것이고, 또 사정을 보수한 것도 곧 향사(鄕射)의 장소이기 때문이다.(열무정 사포계지 쪽87)
사포계는 사정에 속한 모임으로, 원하건대 영구히 규칙을 지키고 시간이 있을 때마다 예능을 익혀나가면 읍(揖)하고 사양(辭讓)하는 풍속을 오늘날에 다시 볼 수 있을 것이며 ,나아가고 물러가는 절차를 옛사람에게 뒤지지 않을 것이다.(열무정 사포계지 쪽86)
5. 현존하는 관습 향사례, 그리고 향약
㈎ 향사례
조선시대에는 태조 이래 역대 왕들이 활쏘기를 즐기어 궁술대회를 장려하였다. 해마다 봄·가을이 되면 한량(閑良)들이 어느 하루를 택하여 편(便)을 갈라서, 혹은 두 사정에서 한량으로만 편을 짜서 편사(便射)하였다.
시합은 80간 거리의 사정(射程)에 높이 12자, 너비 8자의 목판으로 된 과녁을 만들어 세우고 원선(圓線)으로 중심을 표시하여 사정에서 사수들이 번갈아 활을 쏘는데 이때에 기생들은 화려한 옷을 입고 활을 쏘는 한량들 뒤에 나란히 줄을 지어서서 소리를 하여 사수들을 격려하였다. 사수가 쏜 화살 5개가 과녁에 바로 적중된 것을 신호수(信號手)가 신호로 알리면 기생들은 북을 울리고〈지화자...〉라는 소리를 하면서 한바탕 춤을 추었다. (동아백과사전)
1506년 9월 등극한 중종은 1519년 현량과를 도입, 종래의 과거 제도가 본질적인 모순으로 인해 학업을 모두 시험 준비에만 한정하도록 하는 폐단을 노정하고 있을 뿐 아니라 개개인의 인품과 덕행을 판단할 수 없게 한다면서 이를 폐지하고 학문과 덕행이 뛰어난 사람을 천거하는 제도를 통해 인재를 등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천거 제도가 바로 현량과였다. 현량과는 중앙에서는 성균관을 비롯한 삼사와 육조에 천거권을 주고, 지방에서는 유향소에서 천거하여 수령과 관찰사를 거쳐 예조에 전보하도록 했다.
천거 근거로는 성품, 기국, 재능, 학식, 행실과 행적, 지조, 생활 태도와 현실 대응 의식 등 일곱 가지 항목이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천거된 사람은 전정에 모여 왕이 참석한 자리에서 시험을 치른 뒤에 선발되었다. 그래서 후보자 120명 가운데 현량과를 통해 급제한 사람은 28명인데, 그들의 천거 사항을 종합해 보면 학식과 행실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 것으로 나타난다. 또한 이들 28명의 연고지를 살펴보면 경상도 5명, 강원도 1명, 그외 1명 등 7명을 제외하고 나머지 21명은 모두 기호지방 출신이었다. (조선왕조실록 발췌)
㈏향약(鄕約)
조선시대, 권선징악과 상부상조를 목적으로 만든, 향촌의 자치 규약 또는 그 규약에 근거한 조직체다. 중국 송나라 때의 여씨향약(呂氏鄕約)을 본뜬 것으로, 조선 중종 때 조광조를 비롯한 사림파의 주장으로 추진되어 영·정조 때까지 전국 각지에서 실시하였다. 착한 것은 권하고 악한 것은 혼을 내며 서로서로 도움을 위해 마련했던 향촌의 자치 규약은 조선시대인 1517년부터 시행됐다.
그 기본 내용을 보면 첫째 훌륭한 일은 서로 권장한다(德業相勸), 둘째 잘못은 서로 살펴 고쳐준다(過失相規), 셋째 서로 사귐에 있어 예의를 지킨다(禮俗相交), 넷째 환난을 당하면 서로 도와준다(患難相恤)등 네 가지 조목으로 이루어졌다.
향약이 전국적으로 실시된 것은 향약의 임원이 지방자치조직의 요직을 겸임하게 된 것도 요인으로 보여진다. 그러나 탐욕이 많고 행실이 깨끗하지 못한 공무원들은 향약의 기능이 활발해 질수록 자신의 행동영역이 축소됐기 때문에 향약의 성장을 억제하는 경우도 많았는데 그것은 조선후기에 향약의 쇠퇴에도 영향을 미치게 됐다.
㈐조선시대 관직 좌수(座首)
고을의 사족으로 나이 많고 덕망이 있는 사람을 선출하도록 했다. 정원은 읍격에 관계없이 1읍에 1명이 원칙이었던 것 같다. 위상과 선출방식은 시기와 지역에 따라 큰 차이가 있다. 16세기에는 고을의 사족명부인 향안(鄕案)에 등록된 사람들이 모인 향회에서 선출했는데, 반드시 경재소 당상의 승인을 받고, 이임식·취임식도 경재소에서 임원을 파견하여 직접 집행했기 때문에 수령과 유향소의 대립이 심각했다.
1603년(선조 36) 경재소 혁파 이후 좌수의 선출에서 수령의 영향력이 커져 좌수의 역할도 향권을 대표하기보다는 수령의 행정보좌역으로서의 성격이 강해 향리로 취급받기도 했다. 그 결과 영조 때부터의 관찬읍지에서는 향소의 임원을 관직 조항에 넣어 수령의 속관으로도 취급했다. 그러나 18세기까지는 그 역할이 중시되어 안정복(安鼎福)은 <임관정요(臨官政要)〉에서 좌수는 반드시 올바른 사람을 얻을 것이며, 다만 향소를 통해 고을을 다스릴 것을 주장하기도 했다. 안동지역은 전임 좌수가 추천하는 방식을 취했는데, 후기로 갈수록 재선출하거나 중도에 사임하는 경우가 늘고 임기도 1년 미만인 자가 절반 가까이 되었다. 좌수는 대개 고을에 기반이 있는 가문에서 나오는 것이 상례였는데 좌수의 명망이 특별히 높았던 이 지역에서는 전직 관료도 상당수를 차지하며 전직 정승출신도 있다고 알려졌다.(현존 기록상에는 판서가 최고임)
지역에 따라서는 새로 성장, 신분상승한 사람들이 좌수직을 차지하기도 했다. 좌수에게 별감을 추천하거나 향회와 의논하여 임명할 수 있는 권한이 있었는데, 좌수와 동성(同姓)인 경우도 많았다. 이들은 향의 공론을 대변할 뿐만 아니라 군역자차정, 조세, 환곡, 요역부과 등 재정 업무로부터 풍헌임명, 향중의 잡송, 분쟁해결, 풍기유지 등에 많은 역할을 했다. 그러나 계속 위상이 퇴조하여 1896년(고종 33) 지방제도 개혁 때는 향장(鄕長)으로 바뀌었다.→유향소 (사포계지 쪽 88)
Ⅳ. 자료 : 향사례(鄕射禮)와 향사례(饗射禮)에 대하여
㉮세시풍속분야 : 의례 ㉯계절 : 봄(음력3월) ㉰풍속 : 향음주례(鄕飮酒禮)
㉱소개: 예(禮)와 악(樂)의 확립을 통해 성리학적인 향촌교화를 목적으로 시행
한 의례(한국세시풍속사전)
1. 정의(定意)
예(禮)와 악(樂)의 확립을 통해 성리학적인 향촌 교화를 목적으로 시행한 의례. 중국 주(周)에서 향대부(鄕大夫)가 3년마다 어질고 재능 있는 사람을 왕에게 천거할 때, 그 선택을 위해 활을 쏘던 의식에서 유래하였다.
2. 유래(由來)
<주례(周禮)> 사도교관직조(司徒敎官職條)에는 지방 단위를 향(鄕), 주(州), 당(黨), 족(族), 여(閭), 비(比)로 나누고, 그 장(長)을 각각 향대부, 주장(州長), 당정(黨正), 족수(族帥), 여서(閭胥), 비장(比長)으로 정해 놓았다. 그리고 향사례(鄕射禮)는 주에서 행하는 의례로 향대부가 정월에 사도(司徒)로부터 교수하고, 그것을 주장에게 전수하면 주장은 정월 중의 길일을 택해 향사례를 행하였다. 향사례의 ‘사(射)’는 ‘그 뜻을 바르게 한다(定其志)’라는 의미이다.
의례(儀禮) 향사례조(鄕射禮條)에는 ‘주장이 춘추(春秋) 두 계절에 예법에 따라 백성을 모아 주서(州序, 州의 학교)에서 활쏘기를 익히는 것(習射)’이라고 기록하여 향사례의 또 다른 의미를 알려준다.
고려 말 성리학이 전래됨에 따라 향음주례(鄕飮酒禮)와 더불어 향사례가 전래되었다. 향사례에 대한 기록은 세종 때에 보이기 시작한다. 세종 15년(1433) 왕은 술의 해로움을 경고하며 내린 교지에서 “제사를 지내고 술을 마시는 자리에서는 술잔을 주고받는 것으로 절도를 삼으며, 활을 쏘고 술 마시는 자리에서는 읍하고 사양하는 것으로 예를 삼는다. 향사례는 친목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며, 양로례(養老禮)는 나이와 덕 있는 사람을 숭상하기 위한 것이다”라고 언급하였다. 중앙에서 대사례(大射禮)의 시행을 통해서 예와 악을 확립하고자 한 반면, 지방에서는 향사례를 통해서 예와 악의 확립 과정을 거쳐서 지방민을 통치하고 교화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의식을 토대로 시행되는 향사례에 대한 의논은 성종(成宗) 때부터 논의되기 시작하였다. 검토관(檢討官) 정성근(鄭誠謹)은 조정에서 하는 양로례와 대사례에 병행해서 지방에서도 향사례와 향음주례를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 기재된 대로 시행해서 백성을 교화하고 선량한 풍속을 성취할 것을 주장하였다.
성종은 이러한 의견을 수용해서 맹동(孟冬)에는 개성부와 주, 부, 군, 현에서 길일을 택하여 향음주례를 행하고, 매년 3월 3일과 9월 9일에 향사례를 시행할 것을 명하였다.
김종직(金宗直)은 선산부사(善山府使)로 재직할 때에 향사례와 향음주례에 대한 원칙을 준행하고 그 긍정적 결과를 피력하였다. 이에 따르면 향사례에 효제자(孝悌者), 재예자(才藝者)를 참여하게 하여 풍화(風化)에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김종직을 중심으로 한 사림파는 <주례>의 향사례와 향음주례의 실천을 통해서 성리학적인 향촌 교화를 성취함으로써 향촌 자치 체제 확립을 목적으로 하였으며, 이것을 실행하기 위한 기구로서 유향소(留鄕所)를 활성화하려고 하였다. 향촌에서는 향사당을 별도로 설치하여 향촌 재지사족(在地士族)의 중심 기구로 삼고자 하였다. 초기에 안동, 영천, 광주에 향사당이 설치되었다.
예천에서 권오복(權五福)이 지은 <향사당기(鄕射堂記)>에 이르기를 “지금 국가에서 옛 법을 좇아 예교(禮敎)를 숭상하고 향사(鄕射)의 예(禮)를 마련하였다. 아, 활을 쏘는 것(射)은 한 가지 기예(技藝)에 불과하다. 그러나 손님의 차례를 정하고 좌주를 드는 예가 이 의식(儀式)에서 거행된다. 그리하여 한 고을의 선(善)과 악(惡)을 구별할 수 있게 된다. 이는 이 고을의 부로(父老)들이 명칭은 비록 향사당이라고 하였지만 권장하고 징계하는 깊은 뜻이 실로 이 속에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하였으니, 향사례가 향촌 교화(敎化)의 기능을 하였던 것임을 알 수 있다.( 향사당 : 고을의 한량들이 봄, 가을 2회의 모임을 가지고 활쏘기와 잔치를 베풀며 당면 과제나 민심의 동향에 대하여 논하던 곳이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살펴볼 때 중앙의 의도와는 달리 지방에서는 향사례와 향음주례에 대한 시행 의지가 약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성종 10년(1479) 사경(司經) 조위(曹偉)가 지방 수령의 향사례 시행을 검찰할 것을 요청한 것이나, 성종 13년(1482) 전한(典翰) 정성근(鄭誠謹)이 불만 섞인 주장을 편 것 또는 성종 16년(1485) 성종(成宗)의 종용에서도 알 수 있다. 중종조(中宗朝)에 들어서서는 지방 풍속 교화의 방법으로서 향사례보다는 향음주례와 친영례(親迎禮)가 거론되고 있다.
향사례의 실행은 주례(周禮)의 회복이라는 대전제임에도 불구하고 지방민의 교화를 위한 방법으로서 중시될 수 없었던 것은 그 시행 절차가 무척 번거로웠고, 또 일정하게 습사의 과정을 거치지 않았을 경우에는 행할 수 없는 예제인데다가 자칫 잘못하면 타인의 비웃음을 살 수 있는 취약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생각된다. 원래 조선 초기에는 향음주례와 향사례가 고제(古制)이고, 향약은 송대의 시제(時制)이므로 전자에 더 비중을 두었으나, 중종대 사림파 조광조의 등장 이후 향약 보급 운동으로 향약 시행이 더욱 강조되고, 또 향약 규정 안에 향음주례, 향사례, 강신례(講信禮)가 함께 포함되면서 그 기능이 약화된 듯하다. 이후 향사례는 별도로 행해지기보다는 통상 중삼(重三, 3월 3일), 중구(重九, 9월 9일)의 향약 집회 때에 부속 행사로 행해졌다. 정조(正祖)대에는 향례(鄕禮)에 근간을 이루는 향음주례, 향사례, 향약을 종합한 <향례합편(鄕禮合偏)>을 출간하여 유교적 지배 질서에 의한 국가 차원의 풍속 교화를 강조하였다.
3. 내용
세종대 향사례 의식과 절차는 세종실록 <오례(五禮)>에 잘 나타나 있다. 향사례는 군례의식(軍禮儀式)의 향사의(鄕射儀) 항목에 그 절차의 내용이 실려 있다. 이에 따르면 향사례는 해마다 3월 3일과 9월 9일에 개성부(開城府)와 여러 도(道)의 주(州), 부(府), 군(郡), 현(縣)에서 행하는 것이 원칙이다. 하루 전에 주인(소재관사(所在官司))이 빈(賓)에게 알린다. 이때의 빈은 효제충신(孝悌忠信)하며 예의를 좋아하고 행실이 난잡하지 않은 사람 중에서 선택된다. 사단(射壇)은 학당 근처에 만들며 단(壇)과 후(侯)와의 거리는 90보(步)이다. 주빈(主賓)이 서로 예(禮)를 행하고 제자리를 잡으면 술을 세 순배 돌리고는 사례(射禮)를 시행한다.
사사(司射)가 빈에게 활쏘기를 청하면, 빈이 이를 허락한다. 사사가 주인에게 고하고 서계(西階)로 내려와서 제자(弟子)에게 명하여 사기(射器)를 바치게 한다. 사사(司射)가 활을 가지고 네 대의 화살을 등에 꽂고 사단으로 다시 올라와서 활을 쏜다. 주빈이 임시로 서로 짝을 지어 화살 세 대를 등에 꽂고 한 대를 손가락 사이에 끼우고서 차례대로 활을 쏜다. 화살을 쏠 때마다 풍악이 시작되고, 화살을 쏘면 반드시 절차에 맞게 한다. 활쏘기를 마치면, 맞추지 못한 사람에게는 예에 의거해서 벌주를 마시게 한다.
평소처럼 주인이 예를 갖추어 문 밖에서 참석자를 보내는 것으로 향사례를 마친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세종실록 오례 군례의식(軍禮儀式) 향사의(鄕射儀)의 내용이 거의 그대로 <국조오례의>에 수록되었다.
4. 의의
향사례(鄕射禮)는 단순히 화살로 과녁을 맞추는 기예(技藝)를 중요시하는 것이 아니고, 뜻을 바로 하는(正志) 예의와 연고덕행자(年高德行者)를 숭상하고 백성들에게 선악(善)을 권면하고 악(惡)을 징계하는 풍속 교화의 목적을 가진 것이었다.
5.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8권 6책. 목판본. 오례(五禮)는 국가의례를 말하는 것으로 중세사회에서 오례는 단순한 의례규범이 아니라 국가와 왕실, 왕과 신하와의 관계 등을 규정하는 제도이다. 따라서 조선에서 <오례의>는 법전편찬과 동시에 행해졌다. 조선 초기에 <경제육전>을 편찬하면서 세종 때에 <오례의> 편찬을 시도했다. 이 결과가 <세종실록오례의>이다.
세조가 즉위한 후 이것이 불완전하다 하여 강희맹(姜希孟), 성임(成任) 등에게 명하여 <경국대전>과 함께 <오례의주(五禮儀注)>를 편찬하게 했다. 그러나 세조가 중도에 사망하여 작업이 중단되었다가, 성종 초반에 신숙주(申叔舟)를 책임자로 작업을 재개하여 1474년(성종 5)에 완성했다.
<오례의> 개찬과 작업 중단, 재개과정은 세조의 왕권강화 정책과 성종 초반 훈구파의 집권 등 정국변동과 관련이 있다고 보인다. 일례로 세조는 원구단(圓丘壇)을 부활했으나, <국조오례의>에서는 이는 천자(天子)만이 할 수 있는 것이라 하여 뺐다. 편찬에 참여한 사람은 신숙주(申淑舟), 강희맹(姜希孟), 정척(鄭陟), 이승소(李承召), 윤효손(尹孝孫), 박숙진(朴淑秦), 정영통(鄭永通), 이경동(李瓊仝), 유순(柳洵), 구달손(具達孫), 최숙경(崔淑卿)이다.
구성은 길례(吉禮) 가례(嘉禮) 빈례(賓禮) 군례(軍禮) 흉례(凶禮)의 순이다.
이는 <송사>의 순서를 따른 것으로 송대 유학의 수용과 관련이 있다.
권1,2는 길례이다. 권1은 30조로 종묘, 사직, 산천 등에 대한 국가의 제사규정이다. 권2는 26조로 선농(先農), 선잠(先蠶), 기우(祈雨), 석전제(釋奠祭) 등을 수록했다.
주현포제의(州縣酺祭儀), 주현려제의(州縣祭儀), 구우주현영제성문의(久雨州縣榮祭城門), 제악해독의(祭嶽海瀆儀) 등 주현을 단위로 지방관이 시행하는 항목이 증설되고, 기타 의례의 시행방안에서도 지방 단위의 시행을 강화했다. 이는 조선 초기 국가통치체제의 강화정책과 관련이 깊다.
마지막의 사대부서인사중월시향의(士大夫庶人四仲月時享儀)는 백성의 의례이다. 비록 한 조문이지만 서인의 의례까지 언급한 점이 특징적이다.
권3,4는 가례로서 대부분 왕실관계 의례이다. 권3은 21조로 정지(正至)·성절(聖節) 때 중국에 대한 망궐례(望闕禮) 등 사대관계 의례와 명절 때의 조하(朝賀), 조참(朝參), 문무관관의(文武官冠儀), 납비의(納妃儀), 책비의(冊妃儀) 등을 수록했다.
권4에는 왕세자의 책봉, 왕실의 혼례, 방방의(放榜儀) 등 과거관련 의례, 양로연의(養老宴儀), 그리고 각종 국내 사신과 외관들의 의례, 향음주의(鄕飮酒儀) 등을 수록했다.
권5는 빈례 6조로 외국사신을 접대하는 의례이다. 권6은 군례 7조로 대열의(大閱儀), 강무의(講武儀) 등 군사훈련과 관련한 내용이다. 출정의(出征儀) 등을 빼고 항목이 많지 않다. 권7,8은 흉례로 각각 59조와 32조이다. 모두 국장과 왕실의 상제(喪制)와 관련된 내용이다. 백성의 의례는 대부사서인상의(大夫士庶人喪儀) 1조가 있다. 규장각, 장서각 등에 소장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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