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인박사와 일본어 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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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인박사와 일본어 문자

문화관광해설사에게 듣는 내고향 문화유산

우부까따 후미요
문화관광해설사
왕인박사가 일본에 문자를 전했다고 하는데 그 문자가 어떻게 변했고 현재 일본인들이 쓰고 있는 히라가나(平判 ? 名)와 카타카나(片 ? 名)를 왕인박사가 만들었는지에 대한 궁금한 점이 있어 이 자리를 빌려서 말씀드리고자합니다.
4세기 아직기와 왕인박사는 일본으로 건너가서 한문과 유학을 전했고 특히 ‘논어’와 ‘천자문’을 전했습니다. 이후 아직기와 왕인박사의 후예씨족은 야마토(大和)조정에서 문필을 하는 일에 장기간 종사했습니다.
일본서기에서 알 수 있는 것은 한문이 들어왔을 때는 백제에서 도일한 사람들이 서기임무를 맞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또 황태자 토도치랑자( 兎 道稚郞子)가 왕인박사에게 한문을 배웠다고 씌어져 있는데 일본에 있던 토착호족도 도일한 사람들에게 한자와 한문을 배웠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막 한문이 일본에 도입된 시기에는 중국 본토의 정식한문 문법을 따라 성조도 사용한 중국어 발음을 따라서 읽고 있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시대가 지남에 따라 일본어를 기록하기 위해서 한자를 사용하자는 움직임과 외국어로 한문을 읽는 것이 아니라 일본어로서 읽을 수 있도록 하자는 움직임이 나왔습니다. 예를 들면, ‘봄 춘(春)’이라는 한자를 그전까지 중국어식으로 ‘순’이라고 부르고 있었지만, 이 ‘순’과 의미가 가까운 야마토(大和)말인 ‘하루’로 발음하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한자도 씌어져 있는 순서(중국어 문법에 따른 순서)가 아니라 일본어 문법에 따른 순서로 읽게 되었습니다. 논어 문장을 그때까지는 중국 어음으로 읽었지만, 이제는 순수한 야마토(大和)말로 읽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한문을 일본어식으로 읽는 것을 훈독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일본어를 기록하기 위해 한자를 사용하는 움직임에 연결되어갑니다.
역사를 보면 구우카이(空海:弘法大師)가 히라가나(平 ? 名)를 창작했다는 전승이 있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속설에 지나치지 않습니다.
그리고 카타카나(片 ? 名)도 기비노 마키비(吉備眞備)가 창작했다는 전승이 있지만, 이것도 역시 속설에 지나치지 않습니다.
여기서 흥미로운 책을 하나 소개합니다. 한국외국어대학교에서 일본문화에 대해 연구하고 수많은 저작을 발표하고 있는 홍윤기 박사가 썼던’백제는 큰 나라’에서는 일본 ‘가나( ? 名)’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는데 ‘망요가나(萬葉 ? 名)’는 고대 백제인이 만들었다고 주장하고 있어 백제인 왕인박사가 4세기 일본 왕실에 한문의 장시 ‘천자문’을 가져 건너가고 일본 한자식의 문자인 ‘망요가나(萬葉 ? 名)’를 만들었다고 하면서 왕인박사와 아직기의 자손이 그 후 5세기에서 계속되어 만든 문자가 11세기에는 47문자가 되고 현재 ‘히라가나(平 ? 名)’가 완성되었다는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왕인박사가 히라가나(平 ? 名)와 카타카나(片 ? 名)를 직접 만들지는 안했지만, 그의 영향이 엄청난 것으로 볼 수 있고 왕인박사가 오늘날까지 사람들의 심금을 올리는 사람이 됐다는 것은 그가 단순히 천자문과 논어를 가져간 것이 아니라 그의 삶 자체가 일본인에게 보편적이고 타당한 진리를 상징했던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도림선사(道林禪師)는 “세살 짜리 아이도 말을 할 수 있지만, 팔십 노인도 행하기는 어려우니라.”하였습니다.
백낙천은 비로소 알고 있는 것만으로는 아무런 쓸모가 없으며 그 가르침을 실천하여 인격화하지 않으면 교만과 번뇌만이 더할 뿐, 진리의 길에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함을 깨달은 것이라 하였습니다.
왕인박사의 가르침은 어느 한곳이나 한때에 그치지 않고 동서고금을 통해 어떠한 제한도 받지 않는 불변의 가르침이라는 것입니다.

영암군민신문 www.yanews.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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