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진 이끈 주역들은 영암출신…곳곳서 눈부신 활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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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의진 이끈 주역들은 영암출신…곳곳서 눈부신 활약

한말 호남의병史

(下)국사봉 전적지 역사적 의의
지난호에서는 한말 의병의 태동과 영암의병의 봉기, 호남의병의 집결지가 된 국사봉(덕룡산)에 모여든 의병들에 대해서 알아봤다. 이번호에서는 국사봉 의병들의 투쟁사와 격전지 또는 전적지가 됐던 국사봉 골짜기들에서의 항전 기록을 살펴보고, 장렬하게 전사하거나 끝까지 뜻을 굽히지 않고 일제에 항거함으로써 후세에 귀감이 됐던 의병들, 특히 영암의병들의 명단을 공개한다.
의병들의 항전기록이 너무 방대하여 이를 모두 옮기지 못하고 부득히 (사)호남의병항일투쟁기념사업회가 책자발간을 위해 정리한 자료를 참조했다. 방대한 사료를 발굴, 조사, 수집하고 정리한 기념사업회의 노고에 경의를 표하며 호남의병 추모사업과 국사봉 전적지의 성역화사업이 결실을 맺어 기념사업회의 그간의 노고가 헛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편집자주
■국사봉 의병들의 항전 기록
심남일이 이끄는 의진은 의병사의 초기를 제외하고는 동남쪽으로 남하하여 토왜전을 벌였다. 이는 의진의 부장 중에 훗날 독립의진을 이끌었던 남평 출신 의병장 권택(권영희), 호남창의소 소모도통장(召募都統將) 출신이었던 안찬재, 훗날 영암의병장이 되었던 나성화, 강달주 등이 나주 출신이었을 뿐만아니라 박평남 의진에서 선봉장을 지냈던 노병우, 호군장으로 활약한 정관오가 모두 영암 출신이었음에 주목해 봄직하다. 그리고 의진의 구성도 영암의병과 합진한 후에 이뤄진 것으로 보인다.
심남일이 이끄는 의진은 줄곧 덕룡산(국사봉) 줄기에서 토애전을 펼쳤는데, 그가 남긴 ‘접전일기’를 바탕으로 그 개요를 살펴보면,
<1908년 3월 7일 강진 오치동에서 왜적 수십명을 사살하고 병기를 노획한 후 4월 15일에는 장흥 곽암으로 진출하여 왜장 3명을 사살하고, 6월 19일 남평 장담원에서 복병과 기습작전으로 왜병 5명을 사살했으며, 6월 15일 능주 노구두에서 후군장 노병우로 하여금 기습 공격하게 하여 왜적 5명을 죽이고 말 2필 등을 노획했다. 이어 영암군 금정면 사촌에서 영산포 헌병대장 금평산(琴平山) 이하 기병 수십 명을 사살하고, 영암군 덕진면 영보리 내동 뒷산에서 영암수비대장 남본 대위와 부하 10여명을 사살했다>고 기록했다.
이어 8월 1일 나주 반치(盤峙 : 현 영암군금정면 반계 소재-필자 주)에서 20여명의 일본군을 죽이고, 9월 20일에는 장흥 신풍으로 선봉장 강무경이 의병 1백여 명을 이끌고 나아가 일본군 20여명을 사살했으며, 10월 9일 2백여 명의 의병을 이끌고 해남 성내로 들어가 일본 헌병을 비롯 1백여 명을 사살하니 주민들이 환호하며 만세와 함께 박수갈채를 보냈다. 10월 27일 능주 돌정리에서 일본 헌병대를 비롯한 3백여 명의 적에게 포위되어 즉시 응전, 적 20여 명을 사살했으나 아군 측도 후군장 최우평과 결사대장 신예교 등 50여 명의 사상자를 내고 말았다. 그 무렵 덕룡산 주변에서 일어난 토왜전의 내용을 일제는 이렇게 기록했다.
<11월 21일, 폭도 약 1백20명이 능주군 대곡면 월곡(月谷 : 현 화순군 도곡면)에 습래했다. 급보를 받은 능주 분견소장 이상 상등병 4명, 보조원 7명이 즉시 추적, 오후 5시 석정리(石亭里 : 현 화순군 춘양면)에서 3면을 협격, 이를 깨뜨렸는데, 28명을 죽이고 화승총 18정, 기타 잡품을 노획했다.>-(‘전남폭도사(全南暴徒史) 73쪽)
여기서 주목할 것은 첫째, 심남일 의병장은 덕룡산 주변인 영암, 장흥, 능주, 나주, 등지에서 맹활약을 했음이 분명하고, 특히, 나주, 영광, 고창 등지 즉 영산북기맥 지대에서 맹활약하던 전해산 의병장이 덕룡산 자락까지 진출한 점이라 할 것이다. 이른바 ‘전남폭도사’에 의하면 전해산이 10월 17일 나주, 10월 22일 광산, 10월 23일과 11월 9일 함평, 11월 23일 담양으로 진출하다가 11월 26일에는 장흥까지 이르렀다는 것인데, 특히 10월 22일에는 심남일과 합동 작전을 폈다고 기록하고 있다.
둘째, 호남정맥 자락인 덕룡산에서 활약하던 심남일이 먼저 전해산 활동지역이었던 영산북기맥 부근으로 가서 연합 작전에 참여하고, 이에 답방 형식으로 전해산이 덕룡산까지 진출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당시 상황을 조감해 보면, 영암 덕룡산을 중심으로 산 줄기가 펼쳐진 전남 중부지역에는 토왜전이 끊일 날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즉 덕룡산을 중심으로 심남일 의진이 포진하고 서북으로 전해산 의진, 북으로는 양진여 의진, 동으로는 인접에서 토왜전을 벌이던 안계홍 의진 등 대규모 의진이 포진했으니 중소 의진을 포함하면 일제의 기록에서 말한 것처럼 영암, 능주 등지에는 의병이 들끓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게다가 전남 중부지역의 중심지였던 덕룡산을 중심으로 토왜전의 근거지를 마련했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심남일 의진은 능주 ‘돌정리 전투’ 이후 이듬해 1월 19일 박민홍 의진과 연합하여 토왜전을 벌인 후 꽤 오랜 기간 동안 활동을 중단했다. 이는 능주 돌정리 전투에서 강무경과 함께 부상하여 그 치료 기간이었던 것으로 보이며, 겨울을 나기 위해 부대를 분진했던 것으로 보인다.
봄이 되자 심남일 의진은 또다시 토왜전을 펼치기 시작했다. 2월 7일(1908년 양력 2월 26일) 남평 선동 작전에서 왜병 5명을 사살하고, 한편 영산포로 격문을 보내 적을 충동하고, 또 한편으로는 각처 의병장에게 연락하여 농소(農所) 용천(龍川)에 모여 합동 작전을 모의하면서 의진을 5부대로 나눠 대치(大峙), 대항봉(大巷峰), 월임치(月任峙), 덕룡산 꼭대기, 병암치(屛岩峙)에 각각 매복시켜 적의 내습에 대비했다.
일제는 이 사실을 탐지하여 영암, 능주, 나주, 남평, 광주 등지의 토벌대를 투입, 공격해 왔다. 이에 아군과 격전이 벌어져서 적 70명을 사로잡고, 수십명을 사살하였지만 심남일 의진의 본진 총독 박기춘(朴基春), 좌익장 박여홍(朴如洪), 우익장 박태환(朴泰煥) 등 수 많은 장졸들이 희생되었다. 이튿날 의진이 채 정비되기 전에 기습해 온 영암수비대에 포위되어 의병장 박민홍(朴民洪) 이하 23명이 전사자와 20여명의 부상자를 내고 말았다. 당시 농소와 용천 회합에 참여했던 의병장은 수북(水北)의 전해산, 이대극(李大克), 오인수(吳仁洙 일명 오성술), 산동(山東 덕룡산의 동쪽)의 안계홍, 김여회(金如會), 유춘신(柳春信), 인근의 나상집(羅相集 일명 나성화), 박민홍, 박평남(朴平南), 백남시(白南市) 등이었다.
그해 여름 순종의 의병 해산령이 내려지자 의병들은 사기가 크게 위축되었다. 마침내 7월 21일(1909년 음력) 심남일은 영암군 금정면 고인동(古引洞)에서 의진을 해산하고 산 너머 능주 풍치 동굴 속에서 은거하다가 체포되고 말았다.
■덕룡산 전적지들
-국사봉 : 백두대간을 따라 심산유곡이 아름다운 산세로서 예로부터 단군(제)를 지내온 터로서 그 아래로는 (도선국사)가 터를 잡는 쌍계사가 있고 쌍계사를 비롯하여 19개 암자가 있었으나 의병들이 기습 공격을 당하여 현재는 터만 남아있다고 전해 내려오고 있다. 1906년부터 의병들이 6개군 중심지인 관측소로 이용하여 낮에는 깃발로 수신호를 보내고 밤에는 불빛으로 신호하여 6개군 산봉우리를 통해 왜군의 동향을 살피며 연락한 자리라고 한다.
-고인동 : 심남일 대장을 총대장으로 호남의병 600여명이 3년간 주둔하며 대일 항전을 펼쳤던 곳. 금정면 청용리와 쌍효리 사이 계곡. 당시 의병들이 화약과 총기를 제작했던 곳이라고 한다.
-마봉 : 금정면 세류리와 청용리 사이 산봉우리. 사방 관측이 용이해 이곳에서 의병들은 일본군 움직임을 파악했다. 심남일 산하 지역 의병대장 노쌍둥이 형제의 묘가 이곳에 존재한다.
-진터골 : 호남의병 본부가 있었던 곳으로 국사봉으로부터 지휘를 받아 촛대봉을 거쳐 각 진지로 교전 지휘를 내리고, 전세를 파악하고 대책을 강구했던 곳이다.
-칠성동 : 의병들의 은신처였으며 최후 항전지다. 최기옥 부대가 이곳을 방어하고 있을 당시 영암 헌병대와 영산포 헌병대가 합동작전으로 기습공격을 감행해 의병 60~70여명이 그 자리에서 적격당했으며 피가 내를 이루었다고 한다. 최기옥 대장은 부상을 당하여 이곳에서 자결하고 말았다.
-나주 반치 : 현재는 영암군 금정면 남송리 구반계로 행정구역 변경. 의병들이 이곳에서 일본 헌병 광주 수비대와 1907년 8월 1일 교전하여 일 수비대를 격퇴시켰다. 의병과 일경들의 교전이 가장 극심했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용천, 농소 : 1908년 2월 7일 의병장들이 모여 합동작전을 모의하던 중 일본군 토벌대의 기습을 받아 의병장 등 23명이 사상했던 곳이다. 덕룡산(국사봉) 인근.
-장담원 : 옛 장흥군에 속하였으나 현재는 영암군 한대리. 골골이 산세가 험악하여 적들이 공격하기가 쉽지않아 은신처로 적절했다. 전남 총대장 전해산과 함평대장 심남일, 보성대장 안규홍 부대 등이 1908년 3월 11일 잠복하여 추격하던 일 헌병 400여명과 교전하여 100여명을 사살하고 격퇴했다.
■영암의병장 박평남과 항전 기록
박평남은 영암 덕진면 출생으로 의병 2차 봉기때 1906년 면암 최익현이 주도한 순창거의에 참여했다. 1907년 박평남은 사방에 격문을 보내 피끓는 청년들(의병) 600여명을 모아 국사봉에서 훈련을 시켰다.
박평남은 영산포 헌병보조원으로 있던 최경심과 박매수를 통해 화승총 100자루와 실탄, 화약을 구입했으며, 신예교가 의병들의 훈련을 담당했다.
박평남은 최현규 최경심과 함께 무신년 2월 영암수비대를 습격하여 수십명 적을 사살하고 무기를 노획했다.
1908년 3월 함평에서 심남일 부대가 덕룡산으로 활동 근거지를 옮김에 따라 심남일 부대와 합진하여 심남일 휘하 의병장으로 활동했다.
1909년 7월 21일 심남일과 함께 고인동에서 의병을 해산하고 은거하다 일경에 붙잡혀 영암에서 광주로 호송되던 중 다음과 같은 고별시를 읊었다.
밤낮으로 저산 넘어 이강 건너/
구국코자 심신성산 토벌했네/
나 이제가면 언제 다시보리/
선열의 피 얼룩진 월출산이여
<完>
변중섭 기자 jusby@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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