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별 없는 인간평등을 제창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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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 없는 인간평등을 제창하다

묵자(墨子)의 겸애설(兼愛說)

전란이 끊이지 않던 전국시대에 겸애(兼愛)와 비공(非攻)을 주창하며, 한 사람을 죽이면 살인자라 비난하면서 대량살상을 벌이는 침략전쟁은 왜 비난받지 않는가? 정의란 일국의 나라나 군주의 이익이 아닌 천하전체의 이익이어야 한다며 천하를 주유한 사람이 있었으니 이가 묵자(墨子)이다.
묵가(墨家)의 시조는 묵적(墨翟)이다. 그러나 그 생애는 물론 생몰년은 미상이다. 묵(墨)이 성이라는 주장도 있으나 이는 이마에 먹물을 새기는 묵형(墨刑)을 이르는 말이다. 이는 그의 학풍이 천한 집단에 종사하는 노예와 같다하여 상층 집단이 붙인 별칭이나, 하층민을 대표하는 묵자는 이를 자랑으로 여기며 자기 학파의 명칭으로 사용했다 한다.
묵적은 겸애비공론을 주창하며 유가사상을 별애(別愛)라며 이에 대항한 묵가(墨家)의 중심인물이다. 또한 전쟁을 반대(非攻)하고 세계를 지배하는 존재로 천지(天志)를 역설하고 일종의 사회계약설인 상동론(尙同論)을 주장하였다.
이 묵적 및 그 후학인 묵가(墨家)의 사상을 집대성한 것이 묵자이다. 묵자는 15권 53편으로 이루어졌는데 원래는 71편이었다 한다. 묵자는 상현(尙賢), 상동(尙同), 비공(非攻), 절용(節用), 절장(節葬), 천지(天志), 명귀(明鬼), 비락(非樂), 비명(非命)의 10론이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다.
묵자는 ‘유세를 다닐 때에는 그 나라의 급무를 파악하여 말해야 한다. 나라가 혼란스럽다면 상현, 상동을 얘기하고, 나라가 가난하면 절용, 절장을, 음악을 탐닉하는 나라에는 천지, 명귀를 얘기해야 한다. 또한 풍속이 문란하여 예법이 없는 나라에서는 천지, 명귀를, 다른 나라를 침공하려는 나라에서는 겸애, 비공을 말하라’ 고 설파하였다.
묵가(墨家)는 이러한 이상을 실력 행사로 실현하려고 하였다. 그냥 전쟁을 반대한다고 외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군사집단을 조직해 약소국의 방위를 맡으며 생명의 위기를 무릅쓰고 천하의 이익을 위해 분주히 전국시대의 혼란을 온 몸으로 막으려한 실천적인 사상가이자 집단이었다.
전국시대 조(趙) 나라는 연(燕) 나라를 공격하고 그 위세를 몰아 인근의 양(梁) 나라까지 침공하자, 양 나라는 묵가에 구원을 요청하지만 양 나라에 온 것은 혁리라는 묵자 한 명이었다. 그러나 혁리는 조 나라의 공격을 막아 냈다. 이에 양 왕은 혁리에게 포상을 하려 하자, ‘묵자는 타인에게 선물을 받지 않습니다. 사람을 도울 쓸데없는 오해를 받기 때문이라며’ 사양하면서, 많은 적병의 시체를 보며 비탄한다.
이에 양 왕은 ‘ 혁리와 같은 지혜로운 사람에게도 약점이 있다. 값싼 동정심은 필요 없다’고 말하자 양의 대신은 ‘큰 별이 떨어지는 것처럼 묵자는 언젠가 사라질 것이다. 묵가의 사상은 전란의 시대에는 적절하지만 태평성대에는 나라를 번영시키지 못 할 것이다’라고 지적했다.
이처럼 묵가는 천하의 이익을 위해서 침략전쟁을 실력으로 저지했지만, 한 나라의 왕에게 충성하고 포상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오직 천하를 위한 의(義)를 위해 분연히 행동하는 것이 묵가의 기본적인 본질이었다.
조 나라의 침략을 막아 낸 혁리는 책략에 걸려 양성에서 쫓겨나는데 이를 도와 준 사람은 혁리에게 도움을 받은 적이 있는 조 나라의 노예였다. 양 나라를 떠나면서 혁리는 ‘비공과 겸애야말로 평화를 가져다 줄 것이다’라고 노예에게 말했다. 이에 노예는 ‘묵자는 서로 겸애한다며 만인을 사랑하라고 말하지만 실제는 사랑하는 사람을 선택 한다’고 중얼거린다. 여기서 우리는 묵가의 이상이 얼마나 비중국적인 발상인가를 알 수 있다.
묵가의 이상은 겸애이며 비공이다. 침략전쟁을 반대하며 저지하는 비공의 이념은 오늘날에도 존경스럽다. 그러나 비공의 전제인 겸애는 비현실적이다. 사랑이란 만인에게 평등하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 선택한 대상을 향한 감정 즉 친한 자와 소원한 자를 구별하는 것이 오히려 자연스러운 인간감정의 본질이 아닐까. 묵가가 주장하는 겸애는 의 숭고한 이상은 이처럼 보통 사람과는 거리가 있는 것이었다.
묵가의 사상은 권위주의적 경향과 추종자의 복종 요구, 그리고 엄격한 훈련을 통한 막강한 교단을 형성하였으나, 절대적인 겸애와 공리주의, 지나친 금욕주의로 신망을 잃어 전국시대를 끝으로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즉 중국인의 현실적이고 중용적 성격이 비현실적인 묵가의 겸애사상보다는 평범하면서도 현실적인 유교의 차별애를 선택한 것이다.
그러나 천하의 이(利)를 일으키고 천하의 해(害)를 제거하는데 힘쓴 묵가의 이상은 공동체를 이루고 살아가는 현대의 우리가 한번쯤 되새겨 보아야 하는 명제임에는 틀림없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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