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에케나스는 문화예술가들에 대한 적극적 후원으로도 유명하다. 당대 예술가들과 친교를 두텁게 하면서 아우구스투스의 치세를 '예술부국'으로 이끈다. 시인 베르길리우스와 호라티우스 등이 그 대표적인 문화예술인들이다. 이들은 마에케나스의 적극적인 후원 아래 로마의 평화를 노래한다.
기원전 8년, 전 재산을 아우구스투스에게 넘기고 62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한 마에케나스가 이처럼 예술가들의 창작활동을 적극 후원한 일은 오늘날 '메세나' 운동의 기원으로 여겨진다. '기업들이 문화예술에 적극 지원함으로써 사회에 공헌하고, 국가경쟁력에 이바지하는 활동'을 총칭하는 '메세나'는 바로 마에케나스가 그 어원이다.
로마시대를 거쳐 르네상스 시대에 이르면 피렌체의 메디치가가 메세나 운동을 대표한다. 당대의 거장 미켈란젤로와 레오나르도 다빈치 등 예술가들과 마키아벨리 등 학자들을 전폭적으로 지원했기 때문이다. 후대에 이르러서는 1967년 미국 기업예술후원회가 발족하면서 메세나는 비단 예술가들에 대한 지원 뿐 아니라 기업의 문화 예술 및 스포츠 지원, 사회적 인도적 입장에서의 공식적인 예술후원 모두를 뜻하게 된다. 미국의 카네기홀, 록펠러재단 등이 그 대표적인 단체들이다. 특히 기업들 입장에서는 이윤의 사회적 환원 뿐 아니라 이미지까지 높일 수 있어 요즘 들어선 중요한 홍보 전략의 수단으로 이용되기도 한다.
우리나라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1994년에는 '한국기업메세나협의회'가 발족했다. 문화예술에 대한 국민의식을 높여 문화예술 인구의 저변을 넓히고, 경제와 문화예술의 균형발전에 이바지하겠다는 목적에서였다. 2004년에는 메세나 운동이 기업에만 한정될 일이 아니라 일반인들에게도 의미 있는 운동이라는 판단아래 '한국메세나협의회'로 이름을 바꾼다. 창립 이후 1기업 1문화운동, 한국메세나대회, 학술세미나 개최, 찾아가는 메세나, 어린이 메세나 사업, 기업과 예술의 만남 등 다양한 활동을 전개해오고 있다. 현재 230여개의 기업 및 문화예술단체가 협회 회원사로 활동하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수조원 규모에 달하는 선진국에 비해 우리의 문화예술분야 지원금은 연간 1천억원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우리나라 메세나 운동이 각계각층으로 더욱 확산되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한편 요즘 우리사회 메세나 운동의 대명사처럼 거론되는 이가 있다. 바로 동강 하정웅 선생이다. 영암군 홍보대사이자 광주시립미술관 명예관장인 동강 선생은 영암읍 회문리 출신인 아버지 하헌식(河憲植)씨와 어머니 김윤금(金閏金)씨 사이에서 출생한 재일교포다. 그는 1973년 46년 만에 처음으로 부모와 함께 고향을 방문한 것을 계기로 자신의 뿌리인 영암이 한일문화교류의 장이 되도록 많은 지원과 노력을 해왔다. 특히 선생은 광주, 부산, 포항, 전북 등에 이어 고향인 영암군에 평생 동안 모아온 자신의 소중한 미술품 3천500여점을 기증했다. 뿐만 아니라 월출산 도갑사에 석등과 대웅전 복원사업비를 지원했으며, 일찍부터 왕인박사 유적지에 벚나무 식수사업을 꾸준히 실천해오기도 했다. 가난한 문화예술인들에 대한 후원과 함께 수많은 예술작품들을 아낌없이 고국의 미술관에 기증한 메세나 운동의 산증인으로 평가받는다.
군서면 구림리에 개관한 '河미술관'은 동강 선생의 바로 이런 메세나 정신이 깃든 곳이다. 인구 6만명도 채 못 되는 작은 군 단위에 들어선 미술관이지만 그 의미는 대도시 어느 미술관에도 견줄 바가 아닌 이유일 것이다. 동강 선생의 기증품이 소장된 미술관이 비단 河미술관 뿐은 아니다. 하지만 영암군은 바로 동강 선생의 고향이요, 한일문화교류의 원류가 살아 숨 쉬는 곳인 점에서 河미술관은 영암군과 영암군민들의 자긍심 그 자체라고 보아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다면 河미술관을 운영하는 영암군은 기증자인 동강 선생의 참뜻을 살리고 있을까? 한국 메세나 운동의 산실인 河미술관을 제대로 활용하고 있을까? 구림마을에 갈 때마다 제기하고 싶은 질문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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