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서면 도장리 출신
미국 영암군 홍보대사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을 때 얘기다. 나헤라에서 산토도밍고까지 걷던 날이었다. 작은 산을 넘으니 끝없이 넘실대는 밀밭과 군데군데 노랗게 핀 유채밭이 한 눈에 펼쳐진다. 그 사이로 가르마처럼 난 길을 따라 순례자가 배낭을 지고 걸어간다. 아침 해가 떠오르자 멀리 눈 덮인 산이 이마를 드러낸다. 절경이다. 절경은 형용을 불허한다.
가파른 고개를 올라가는데 자전거 선수들이 지나가기 시작한다. 울퉁불퉁한 자갈길을 산악자전거를 몰아 씩씩거리며 달려가는 선수들의 등짝에 커다란 번호판이 붙어있다. 선수들이 많은 걸 보니 꽤 큰 대회인 모양이다.
오후 두 시쯤, 산토도밍고에 도착했다. 거리에 사람들이 북적거린다. 숙소인 알베르게에 짐을 풀었다. 시상식을 하는지 쩌렁쩌렁한 마이크 소리와 관중들의 환호성이 들려온다. 행사장인 칼사다 광장이 멀지 않다고 한다.
몸을 씻고 시내구경을 나갔다. 산토도밍고 성당을 거쳐 광장을 둘러보았다. 잔치는 끝나고 몇 사람이 골인 지점에 설치된 고무풍선으로 만든 개선문을 철거하고 있다. 취재를 마친 TV방송국 중개차가 행사장을 빠져 나간다. 그 많던 사람은 다 어디로 갔을까.
광장을 나와 숙소를 향해 한참을 걸었다. 그 때, 멀리서 사이렌 소리가 들렸다. 아니, 자전거 선수가 아닌가! 마지막 선수가 자전거를 몰고 들어오고 있다. 쓰러질 듯 쓰러질 듯 혼신의 힘을 다해 달려오고 있다. 오가는 사람들이 발걸음을 멈추고 박수를 보낸다. 나도 뜨거운 박수를 보냈다.
선수는 있는 힘을 다해 휘청휘청 자전거를 몰아간다. 행사 진행차가 사이렌 소리를 울리며 그 뒤를 따라간다. 행사진행 트럭에 선수 두 명이 앉아 있다. 자전거에 문제가 생겼거나 몸이 아파 자동차를 타고 오는 모양이다. 차에 있는 선수들이 앞서 가는 선수를 바라본다. 동료 선수를 바라보는 눈에 안쓰러움과 부러움이 함께 들어있다.
몇 킬로를 달려왔을까. 기진맥진 비틀거리며 골인지점을 향해 자전거를 몰고 가는 선수의 뒷모습이 골목을 돌아 사라졌다. 선수를 맞이하는 환호성은 커녕 개선문 마져 철거해버린, 텅 빈 광장을 향해 그는 달려갔다.
일등 선수가 골인한 지 두세 시간이 지난 지금, 무슨 사연이 있었기에 이제야 도착했을까. 땀 범벅이 되어 숨을 헐떡거리며 달려가던 꼴찌 선수의 얼굴이, 포기하지 않고 끝내 결승점을 향해 당당히 돌진해 가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숙소에 돌아와 순례자들에게 꼴찌 선수 얘기를 했다. 무릎이 고장나 이틀째 알베르게에서 쉬고 있다는 영국인 순례자가 말했다. “산티아고 순례길은 누가 먼저 가는가를 겨루는 곳이 아니지요, 각자의 힘에 맞게 걸어서 산티아고에 도착하면 누구나 승자가 되는 길이지요. 우리 인생도 그렇지 않을까요. 내 길을 내가 걸어가는 겁니다. 그 선수처럼 포기하지 않고 결승점에 도착하면 결국 이기는 자가 되는 거지요.”
산토도밍고를 생각하면 꼴찌 선수가 떠오른다. 손바닥이 아프도록 갈채를 보내던 사람들의 모습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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