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주홍의 초선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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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주홍의 초선일지

저는 1976년부터 77년까지 13개월동안 육군교도소 '생활'을 했습니다. 대통령 긴급조치 9호 위반 죄목이었습니다.
다행히 이 '긴급조치'가 위헌판결(2013년3월21일)을 받았습니다. 이에 따라 저는 작년 5월15일, 그러니까 38년 만에 무죄 판결을 받았습니다. 아래「진술서」는 제가 지난 7월에 작성했습니다. 이 사건 관련 손해배상청구소송으로 서울중앙지법에 제출한 것입니다.(※ 저는 최근 이 소송을 취하했습니다만…)
제 나름의 기록을 위해 오늘「초선일지」에 싣습니다. 저의 한 시대가 정리되는 것입니다.
진 술 서

진 술 자 : 황주홍
주민등록번호 : 52×××-×××××××
1. 사건 개요
①1976.4.20. 대학선배에게 정부 비판적 내용이 담긴 편지 발송
②1976.5. 초 편지가 보안사 검열에 걸려 광주시 소재 전교사 영창에 불법구금
③1976.6.2. 비상군법회의 1심에서 징역 1년 자격정지 1년 선고
④1976.10. 고등군법회의에서 항소 기각
⑤1977.3. 대법원에서 원심 파기 환송
⑥1977.6.29. 고등군법회의에서 집행유예(2년) (징역 1년, 자격정지 1년) 선고로 석방
⑦1979.10.10. 대법원에서 상고 기각
⑧2014.5.15. 광주고등법원에서 무죄 판결
2. 관련 진술
□ 1976년 4월 20일 제 학교 선배 김OO에게 보낸 일반 편지가 검열에 걸려, 편지내용이 당시 대통령 긴급조치 9호 위반사건이 된 것이었습니다.
□ 1976년 5월 초순 어느 날 오후 4시쯤 보안사 요원들이 제가 근무하고 있던 전남 강진군 대구면 예비군 중대에 나타나서 다짜고짜 저를 연행해갔습니다. 이 요원들은 “두발 상태가 불량하다.” 는 등의 이유를 내세우며 저를 검정색 짚차에 태웠습니다. 무언가 불길한 예감이 들었지만, 긴급조치 위반사건일 줄은 꿈에도 모른 채 붙잡혀 갔습니다. 가다가 짚차가 고장이 나서 두어 시간을 허비한 바람에, 광주에 있는 전교사(전투병과교육사령부)에 도착할 때는 이미 어두운 밤이었습니다. 저한테는 단 한마디의 설명도 없이 저는 전교사 영창에 구금되었습니다.
□ 제가 대통령 긴급조치 9호 위반 혐의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약 보름이 경과한 뒤였습니다. 구속되고 나서 일주일 정도가 경과했을 때 제 어머니가 면회를 오셨고, 그 뒤 황성수 변호사(전 국회부의장, 작고)와 함께 오셔서 설명을 듣고 난 뒤였습니다. 저희 가족들의 충격은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 당시 긴급조치 위반으로 걸리면 ‘인생 조지는 것’으로 알고 있던 때였습니다. 제가 13개월 동안 전교사 영창과 남한산성 육군교도소에 구금되어 있던 동안 저는 오로지 한 달에 한 번 밖에 없던 면회 때 어머니 한 분만을 면회할 수 있었습니다. 저를 면회하러 온다는 사실 자체가 신변에 부담과 위협이 될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떨고 있었던 것이 당시의 환경이었습니다.
□ 서울에서 학교(연세대 정외과)다니던 아들이 고향(전남 강진군)에 내려와 군복무하다가 어느 날 갑자기 긴급체포되어 끌려가더니 대통령 긴급조치 위반죄라는 사실이 알려지자, 고향 사람들의 충격과 놀라움은 엄청났다 합니다. 특히 처음 며칠간 제가 어디로 끌려간 행방조차 확인할 길이 없던 가족들은 두려움 속에 며칠을 백방으로 수소문했습니다. 제가 끌려가던 날 저녁부터 아버지(황호근)는 폭음으로 충격과 공포를 달래시려 했습니다. 거의 매일 그러셨다고 들었습니다. 제가 14개월 복역을 마치고 출감해서 고향마을에 내려갔을 때, 이미 아버지는 위암 판정을 받고 누워 계셨습니다. 1년 사이에 아프리카 결식아동처럼 삐쩍 말라버린 아버지를 양지바른 평상에 옮겨드리고 다시 방으로 모셔다 드릴 때, 아버지의 체중은 너무 가벼워서 아버지 뒤에서 저는 불효의 눈물을 훔쳐야 했습니다. 그 뒤 아버지는 결국 타계(1977년)하셨습니다.
□ 전교사 영창에서는 2개월 가까이 구속되어 있었습니다. 먹는 것도 그렇고, 구타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육군교도소에서의 것들에 비하면 영창은 차라리 양반이었습니다. 1976. 6. 초순 육군 죄수복에 손을 포승줄로 묶인 저는 다른 이감자들과 함께 광주발 완행열차편으로 용산역까지 밤새워 상경했습니다. 열차에서 타고 내릴 때 박박 밀어버린 까까머리의 육군 죄수들을 힐끗힐끗 쳐다보던 다른 칸에 탔던 승객들의 눈길을 저는 지금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절망적인 수모감으로 저는 몸을 숨기고 싶을 지경이었습니다.
이른 아침 용산역에 도착한 이감자들은 당시 ‘남한산성’ 으로 통칭되며 악명 높던 육군교도소에 실려 가게 되었습니다. 육군교도소 안에 들어가서부터 저는 시국사범이라고 해서 더욱 심하게 구타를 당했습니다. 특히 오른손 주먹을 쥔 뒤 세 번째 중지 끝으로 제 가슴팍의 명치 끝을 계속적으로 내리 찍혔던 고통은 지금도 숨이 막힐 지경의 공포와 고통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때의 그 구타로 저는 그 뒤 몇 개월간 가슴의 뼈 전체가 손을 댈 수 없을 정도로 아파왔고, 호흡을 제대로 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 육군교도소에서는 12개월 정도 갇혀 있었습니다. 이런저런 체벌로 독방 수감도 1개월 남짓해야 했습니다. 나머지 기간은 대체로 같은 정치범 사상범들 10여명이 한 방에서 지냈습니다. 아침 5시 30분에 기상해서 밤 10시에 취침하는 생활이었습니다. 저같은 정치범들은 한 달에 한 번 밖에 면회가 되질 않았습니다. 다른 일반 수형자들은 매일 면회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매일 감방 밖으로 노역을 나갔지만, 정치범들은 하루 종일 방에 갇혀 있어야만 했습니다.
서적도 순수 종교서적 외엔 일절 영치되지 않았습니다. 높은 천정 위에 백열 전구 하나가 희미하게 24시간 방을 비추고 있었습니다. 시력이 나빠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세끼 식사는 일반 군부대의 식사와는 전혀 딴판의 형편없는 수준이었습니다. 계속 미결수 지위였던 저로서는 식사 배식수준이 인권침해의 소지가 있다고 항의했다가 고초를 겪기도 했습니다.
일요일 점심엔가는 늘 라면이 나왔습니다. 보통 라면과는 달리, 그곳의 라면 사리는 불대로 불어서 찰떡처럼 엉켜 있어서 라면 가닥을 뜯어낼 수가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 라면 사리에 라면 스프 하나만 나왔습니다. 그러면 그 라면 사리에 스프를 뿌려서 젓가락으로 비빈 뒤 먹는 식이었습니다. 라면 국물조차 없는 라면이었지만, 그래도 그때는 그것이 가장 기다려지던 배식이었습니다.
목욕도 1년에 한 두어 번 화장실에 불러다 놓고 미지근한 온수를 호스로 뿌려주면, 수십 명의 젊은 죄수들이 그 물을 받아 머리를 적시고 사타구니를 씻어내는 그런 식이었습니다.
□ 교도소 밖의 어머니는 이곳저곳 탄원서를 받으러 다니시고, 1심→2심→3심→2심→3심을 거치는 동안 변호사들을 만나고, 변호사 비용을 마련하시고, 한 달에 한번 남한산성에 면회 오셔서 못난 아들을 뒷바라지 하시느라 경제적으로,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설움에 찬 끝없는 고초와 고통을 겪으셔야 했습니다. 그 어머니는 최근(2014) 세상을 뜨셨습니다.
□ 국가 권력기관에 의한 자의적 인권 유린과 인격 파괴의 비극이 다시는 이 땅에서 되풀이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2014.7.14. 황주홍(인)
(2015년8월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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