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론 ‘학생에 의한 교사 폭행 사건’이 어제 오늘 일은 아니다. 그런데 이 문제가 주목을 받는 것은 2016년 벽두인데다가 교권침해가 이렇게 적나라하게 내비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동안 갑(甲)의 위치인줄 알았던 교사가 사실은 갑(甲)이 아니라 을(乙)도 아닌 병(丙) 쯤 되어 버린 것이다. 그 ‘병(丙)’ 뭐시기 쯤 되는 교사 중에서도 기간제 교사는 정(丁)이나 그 아래 단계의 존재로 인식된다는 것이다. 동영상을 통해 기간제 교사는 이미 스승이 아니라 지식을 전달해주는 한낱 나이만 많은 비정규직 아적씨가 되어버렸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처럼 교권이 땅에 떨어진 것에 대해 본격적으로 논란이 된 것은 2011년 체벌금지법이 발효된 이후부터라고 본다. 체벌금지법의 근본 취지는 좋았다. 그동안 교권이 지나쳐 학생의 인권이 무시되어 왔다는 것이다. 학생들은 정당한 교육을 받을 권리가 있고, 학생들이 체벌을 받지 않아도 된다는 권리를 살리려고 추진된 것 법이었고 많은 사람들이 이 법의 긍정적 효과를 기대했다.
그런데 언제나 문제가 되는 것은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라고나 할까? 특수한 경우를 일반화 시키면서 특수했던 상황에서 발생한 문제점이 마치 그 문제점의 전부인 것처럼 인식하면서 정작 오랜 시간 동안 통용되어온 일반적인 규칙이 무력화 되고 부작용이 장점보다 커져버리는 현상이 생긴다는 것이다. 즉 학생의 인권을 살리자고 교권을 빼앗아 버린 것이다. 학생의 인권도 살리고 교권도 살리는 진지한 고민 없이 무작정 정책을 추진해버린 탓이다.
어쨌거나 교권을 잃은 교사는 무장해제 당한 군인이 적진에 뛰어든 것과 같은 모습이 되었다. 학생들은 질풍노도의 시기에 돌입해 호기심이 충만하고 마치 성인이 된 것과 같은 착각에 힘겨루기를 하고 싶어 했는데 그 대상이 교사가 된 것이다.
사춘기의 학생들이 공격(?)의 대상으로 삼는 상대는 부모가 되기도 하고 때로는 교사도 된다. 그런데 부모는 자신에게 식량과 자금을 대는 최후의 보루인 관계로 약간은 고분고분 해야 하는 여지가 있지만 교사는 그런 대상이 아니다. 게다가 교편도 빼앗긴 교사라면 이제 만만해진 것이다. 일부러 교사를 자극해서 교사가 폭발하도록 하고 이를 동영상으로 찍기도 하고, 더 만만한 교사는 정면으로 부닥치기도 한다. 어차피 교사는 자신들을 때릴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게다가 교사가 성인이라지만 단 1명뿐이고, 이 교사가 상대해야 하는 학생은 무려 30~40명에 달한다. 전에는 그나마 어른이라는 경험의 우위, 지식의 우위, 교편을 쥔 교사라는 권위가 있었기에 버텼는데 사회는 별다른 대안도 없이 교편만 빼앗아 버렸다. 학생의 비뚤어짐을 막기 위한 장치 중에 꽤 비중 있는 하나가 없어져 버렸으니 통제가 될 리 없다.
또한 교육에 도덕과 체육이 없어지고 오직 지식 습득 위주로 전개되다보니 인격수양 없는 사회인 즉 무법자만 양성시켜버린 것이다. 이러한 도덕적 결함은 사회인으로서 갖춰야할 최소한의 양심과 인도주의적 개념마저 앗아버려 불법과 일탈이 왜 문제인지 조차 인식할 수 없는 짐승을 만들고만 것이다.
이제는 이러한 불합리한 일이 정상 궤도에 오르도록 해야 한다. 우리는 꽤 오랜 시간동안 학생들을 공부하는 기계로 만들어 왔다. 학생들을 다시 가슴이 따뜻한 사람, 남을 배려하는 사람으로 만드는 데는 많은 비용과 시간이 필요하다. 지금이라도 바로잡으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더 이상 패륜사건이 발생하지 않도록 사회 구성원 모두가 힘써야 할 때이다.
성경 중 잠언 13장 24절을 보면 “매를 아끼는 자는 그의 자식을 미워함이라 자식을 사랑하는 자는 근실히 징계하느니라”라고 저자 솔로몬이 말한다. 이 말은 후에 ‘매를 아끼면 아이를 망친다’는 말로 잘못 전해지기도 하지만 동서고금을 통틀어 가장 훌륭한 교육의 도구로 ‘매’를 말한다. 그저 많이 때려서 바로 잡으라는 것이 아니다. 이 매로 잘못을 인지시키고 고통을 줘서라도 바른 길로 안내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말한다. 물론 지나치지 않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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