엊그제 동료들과 함께 농촌 일손 돕기에 참여했다. 농번기철을 맞아 일손이 부족한 농가를 돕자는 생각에서다. 들녘으로 가는 길엔 금계국이 활짝 펴 눈을 행복하게 했다. 찔레꽃과 산딸기도 눈길을 끌었다.
들녘엔 보리이삭이 누렇게 익어 마음까지 풍성하게 해주었다. 이미 모를 낸 논도 보이고, 모내기를 위해 써레질을 하는 트랙터도 부산한 모습이었다. 모두가 낯익은 풍경들이다. 들녘이 친근하고 포근하게 다가섰다. 늘 고향인 농촌을 마음속에 품고 살아온 탓에 낯선 풍경이 아니었다.
일손 돕기는 영암 덕진 들녘에서 했다. 비닐 안에서 자란 고구마 순을 밖으로 빼내주는 작업이었다. 우리가 해야 할 면적은 1만여㎡(3000평). 면적은 꽤나 넓었지만 그리 부담을 주지 않았다. 금세 할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웬걸. 막상 일을 시작하니 처음 생각과 달랐다. 힘들고 어려웠다. 밭두렁에 쪼그리고 앉아 비닐 안에서 자라고 있는 고구마 순을 밖으로 빼내주는, 노동이라고 할 것도 없는 아주 단순한 작업이었지만 예상 밖이었다.
일손이 부족해 고구마 순을 진즉 빼내주지 못한 탓에 줄기에서 싹이 트고 있었다. 게다가 이미 시들어 가벼운 접촉에도 고구마 순이 떨어지기 일쑤였다. 완만한 경사를 이루고 있는 밭고랑도 눈으로 보기에 멋있고 아름다웠지만 일을 더디게 했다.
하지만 우리 모두는 고구마 순 하나라도 다치지 않도록 조심조심 다뤘다. 물론 일을 빨리 끝내고픈 마음도 있었지만 기왕에 하는 것, 손이 두 번 가지 않도록 하는 게 중요했기 때문이다. 기다란 밭고랑 하나씩 맡아서 일을 하다가 마신 막걸리의 맛은 갈증을 씻어주기에 충분했다. 묵은 김치에 싸먹은 두부 맛도 일할 의욕을 북돋았다.
가까운 도로변 기사식당에서 점심식사를 하고 준비해 간 수박 한 조각씩 먹은 다음 다시 밭고랑에 앉았다. 햇볕은 벌써 여름을 방불케 했지만 연일 들녘에서 비지땀을 흘리는 농군들을 생각하니 견딜만했다.
어릴 적, 배고픔을 달래주던 이 고구마가 요즘 인기 상종가라고 한다. 우리 전남에서 생산된 황토고구마가 외지인들의 입맛을 사로잡고 있다는 게 밭주인의 얘기다. 그 이야기를 듣고 나니 고구마 순을 세워 흙을 덮어주는 내 손끝에서도 보람이 묻어났다. 비록 서툰 솜씨지만 정성을 다할 수 있었다.
나의 작은 손길 하나가 농촌의 부족한 일손을 조금이나마 덜어주고 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니 가슴도 뿌듯해졌다. 내 손으로 세운 고구마 순이 무럭무럭 자라 나중에 튼실한 고구마가 주렁주렁 달린다고 생각하니 일하는 재미도 있었다.
작업은 오후 4시를 넘겨서 겨우 끝낼 수 있었다. 일손을 더 거들고 싶은 마음이 있었지만 다른 일정 때문에 그렇게 하지는 못했다. 밭주인과 인사를 나누고 돌아서려는데 “수고했다”는 말과 함께 “요즘 농촌이 너무 어렵다”며 긴 한숨을 토해낸다.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었지만 들녘에서 농촌의 어려운 현실을 다시 한번 듣고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풍작을 이뤄도 걱정, 흉작이어도 걱정이라는 건 이미 고전이 돼버렸다. 천정부지로 치솟는 유류대와 하나도 빼놓지 않고 다 오른 자재비, 그리고 인건비까지….
생산비의 가파른 상승으로 생산비를 건지기는커녕 오히려 빚만 지고 있다면서 ‘죽지 못해 살고 있다’는 말에 할 말을 잃었다. 심지어 “모든 분야가 어렵다고해서 어디다 내놓고 하소연하기도 부담스럽다”면서 “모든 국민들로부터 동정심이라도 받고 있는 한우 사육농가가 부럽기도 하다”는 한 시설원예 농가의 얘기는 절망으로 다가왔다.
농촌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낸 나이기에 결코 남의 얘기가 아니었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머리가 멍- 했던 건 이 때문이었을 것이다. 농촌의 어려움을 지금보다 더 이해하고, 농촌사랑의 마음을 더 넓혀야겠다는 다짐을 스스로 한 것도 차 안에서였다.
한편으로는 농촌에 사는 우리 아버지, 어머니들이 힘이 들더라도 재밌게 일하는 세상을 그려봤다. 봄에 씨앗을 뿌리면서 풍성한 가을을 떠올리고, 가을엔 수확의 기쁨을 맛보며 함박웃음을 짓는 그런 소박한 풍경을….
예부터 땅은 진실하다고 했다. 이는 일한 만큼 소득을 가져다준다는 말이다. 지극히 평범한 진리가 오늘에도 계속 통했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본다.
그리고 올 가을엔 대처에 나가 살고 있는 지인들한테 고구마 한 상자씩 선물하련다. 공기 맑고 비옥한 땅에서 자란 우리 전남 농산물의 맛을 보고 또 사서 먹을 수 있도록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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