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 "박사는 군주에 대해 고문으로 시종(侍從)하거나 또는 유학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일도 수행해 왔다"면서, "당시 유학은 고대 이래 백성들을 교화하고 통치하는데 중요한 통치 수단으로 이용되어 왔기 때문에 유교정치이념이 강조될수록 박사의 지위와 역할이 지대했을 것으로 생각되며, 집권체제 정비과정에서 박사에 주목하게 되는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양 교수는 특히 "백제의 박사제도 설치는 중앙집권적 귀족국가의 탄생을 알리는 상징적 조치로 이해된다"면서 "그 설치시기와 성격에 대해서는 근초고왕대 또는 무령왕대로 보는 두 견해로 나뉘어져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근초고왕대에 설치된 박사가 한학과 유학에 능통한 한군현계 지식인을 편제하기 위해 설치한 특수 관직이었지만 박사의 기능을 더욱 확대해 오경박사제를 도입한 것은 6세기 경 무령왕대(501~523)의 일"이라면서 "근초고왕대에 원초적인 형태의 박사관이 설치된 이래 무령왕대에 이르러 박사제도가 정비됐다"고 주장했다.
이어 "무령왕대에 오경박사 운영에서 주목되는 것은 이 제도를 신라와 왜 간의 대외관계에 적극 활용하고 있었다는 점"이라면서 "백제는 고구려에 대항해 유사시 정치적 군사적 목적을 위해 오경박사를 파견했으나, 오히려 이를 통해 백제의 선진 문물이 왜에까지 전해져 일본 고대국가 발달에도 큰 기여를 하게 된 것"이라고 말했다.
양 교수는 "백제는 왜국에 오경박사와 전문기술자까지 파견했다"면서, "백제가 왜국에 파견한 문물교류를 위한 사절단 구성은 무령왕대에는 오경박사 위주였고 규모도 소규모였던 반면 성왕대에 왜국에 체류하는 사절단은 단장-오경박사-승려에서 새로이 역박사-의박사-채약사-약인 같은 전문기술관료들이 추가되면서 규모가 훨씬 커졌다"고 설명했다.
특히 양 교수는 박사 왕인에 대한 인식과 평가에 대해 "백제의 박사로서 일본열도에 제일 먼저 알려진 사람이 왕인"이라면서 "고대 일본의 공식적인 역사기록인『고사기』(712년 편찬)와 『일본서기』(720년 편찬)에 의하면 박사 왕인이 아직기의 추천을 받아 왜국에 건너와서 한자의 학습서인 천자문과 유교경전인 논어를 가져왔다고 전한다. 이들은 태자의 스승이 되어 유교경전 등을 교육했을 뿐 아니라 양마(良馬) 기술 등을 전수한 것으로 돼 있다. 이를 통해 당시 백제와 왜국은 전문 지식인의 인적 교류가 진척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일본에서는 천자문과 논어를 전한 왕인에 대해 단순한 '문자의 전수자'가 아니라 '학문의 시조(文首, 書首)'로 높이 추앙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양 교수는 그러나 "이처럼 왕인에 대한 사적이 일본에서 널리 알려진 것과는 달리 진작 우리나라 사서에는 거의 전하는 것이 없다. 그는 언제 어디서 태어났으며, 어떤 인물이며, 언제 도일했으며 왜국 내에서 어떤 활동을 했는지, 그리고 그 후예씨족들은 어떠한지 등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기 때문에 적지 않은 논란이 있다"면서, "현재 분명한 것은 왕인에 관한 일본사서의 기록을 제외하고는 '영암출생설'과 '유적지존재설'에 의거해 왕인유적지와 왕인문화축제가 영암에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이라고 아쉬워했다.
양 교수는 박사 왕인에 대한 후대인들의 인식과 평가에 대해 "첫째, 논어를 비롯해 많은 유교경전과 전적을 일본에 전래했고, 그것을 태자를 비롯한 지배층에게 가르쳐 유교문화를 전수한 '학문의 스승'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면서, "왕인은 일본 내에서 동아시아 사회의 지배이념이자 학문·사상으로 유교·유학으로 상징성을 가진 논어를 전수해 학문의 시조로 추앙되고 있다. 왜국 왕자의 교육을 담당한 학자, 교육자로서의 역할을 높이 평가받는 인물이 바로 왕인"이라고 지적했다.
양 교수는 이어 "둘째로, 왕인은 일본에 처음으로 한자를 전래하고 그것을 응용해 일본글자의 원형인 가나(假名)를 만들어 준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면서, "왕인은 문명화의 필수불가결한 요소인 한자문화의 상징 천자문을 일본열도에 전한 문자문화의 전수자로서의 위상을 갖는다. 751년에 편찬된『회풍조(懷風藻)』에서는 '왕인은 왜어의 특질을 훼손하지 않고 한자를 이용해 왜어를 표현하는 방법을 개발했다'고 해 일본 문자의 창안자로서의 공적을 인정했다"고 강조했다.
양 교수는 또 "셋째로, 일본에서는 왕인에 대한 존숭이 민간에게 널리 보급되어 추모와 신앙의 대상이 되고 있다"면서 "현재 오사카부 히라카다시(枚方市)에는 왕인 묘소로 전하는 유적이 있으며, 오사카부 마츠바라시(松原市)에는 왕인을 모시는 사당으로 왕인성당(王仁聖堂)이 있다. 그밖에 왕인을 신으로 모시는 신사가 사가현 간자키시(神埼市) 등을 비롯해 칸사이지역에만 7군데 이상이 분포하고 있으며, 이곳에서 왕인축제가 열리는 등 그를 기리는 민간행사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고 강조했다.
양 교수는 이를 토대로 "앞으로 우리나라에서도 왕인에 대한 관심과 연구가 심층적으로 이뤄져 그간 해명되지 못했던 왕인의 실체가 밝혀져 교류왕국 백제의 동아시아교류사 역할 일면을 발굴해 내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 '고구려와 신라의 교육기관과 박사제'
노중국 계명대 명예교수는 '고구려와 신라의 교육기관과 박사제'에 대한 주제발표를 통해 "삼국은 중앙집권적 국가체제를 갖춘 이후 때로는 대립하고 때로는 화호하면서 영토의 확대를 도모하고 또 중국 세력의 침략에 대항했다"면서, "따라서 삼국은 이러한 시대 상황을 타개해 나갈 수 있는 지식과 용기와 인품을 갖추고 절의와 명절을 체현해 내는 인물을 인재들을 양성하려고 했으니 이러한 인재가 바로 국사(國士)"라고 설명했다.
노 교수는 이어 "국사는 의리를 알고 공의를 위해 자신을 희생할 수 있으며 국가에 충성할 수 있는 정신적 무장이 이루어진 사람을 지칭하는 용어였다"고 해석했다. 즉, "중국에서의 국사는 명성이 한 나라를 뒤덮은 사람을 말한다. 국사는 자신을 알아주는 주군에게 충으로 보답했으며, 기본적으로 문무를 겸전한 인재였다. 화랑도와 경당에서 키우고자 한 인재는 바로 문무를 겸전한 국사였던 것"이라며, "국사가 되기를 서원한 젊은이들은 벼슬길에 나아가서는 불의와 타협하지 않았으며, 전쟁터에 나아가서는 비겁한 상황에 부닥쳤어도 국가와 대의를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았다. 계백을 따라 황산벌 전투에 참여한 오천명의 결사대는 장렬한 죽음을 맞이했다"고 소개했다.
■ '오경박사와 왜(倭)'
백제, 오경박사 통해 동아시아 교류주도국 자리매김
정재윤 공주대 교수는 '오경박사와 왜'에 대한 주제발표를 통해 "오경박사는 백제와 왜 양국의 필요에 의한 교류이며, 선진문화 전파의 흔적"이라며, "이는 단순히 문화의 수용자 입장인 왜의 필요만이 아닌 백제의 필요도 있었다"고 강조했다.
정 교수는 왜가 오경박사를 받아들인 이유에 대해 "일본은 중앙집권국가로 나아가기 위해 6세기 이후 국조제를 실시하는 등 노력을 기울였고, 이런 과정 속에서 유교, 불교 등 국가 기반, 즉 사상과 이념을 받아들이는 것은 필수불가결한 요소였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또 백제가 왜에 오경박사를 파견한 목적에 대해 정 교수는 "백제가 왜로부터 군사적 지원을 제공받는 대가로 이들이 절실히 필요한 선진문물과 제도를 제공한 것"이라고 보았다.
정 교수는 특히 "백제의 오경박사와 유사한 모습이 신라에서도 확인된다"면서, 이는 "백제가 고구려와의 전쟁에 신라를 견인하기 위해 선진문물과 제도를 전파해주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주장했다.
정 교수는 이를 토대로 "오경박사는 단순히 이해하고자 한다면 '오경에 능통한 유학자'이지만, 오경박사에 대한 진정한 이해는 단순히 한 나라의 모습을 살펴보는 것이 아니라 양나라와 백제, 그리고 왜까지 이어지는 동아시아 핫 라인(hot line)을 살펴볼 때 가능할 것"이라며, "백제는 나라 내의 재정비를 위해서 양나라로부터 오경박사제를 받아들인다. 하지만 이 전부터 오경박사의 뿌리가 되어주는 박사들이 보이며, 이것을 기반으로 해 백제화를 이루며, 왜로 다시 전파하는 모습까지 보인다. 이는 백제를 단순히 문화의 수용자와 전파가 아닌 동아시아 공유문화를 주도한 국가로 자리매김할 수 있는 역사적 의의를 지녔다고 할 수 있다. 그 으뜸에 오경박사가 있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고 강조했다.
사진=영암군청 강평기
이춘성 기자 yanews@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