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의 풍운아 조광조 권력개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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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풍운아 조광조 권력개혁

이진 前)영암군 신북면장 前)전라남도 노인복지과장 前)완도부군수
조선왕조 한 시대를 풍미했던 대표적 개혁가를 꼽으라 하면 단연 조광조를 말한다. 조광조는 한성 출신으로 조선왕조 개국공신 조온의 5대손이다. 17세 때 종6품 어천찰방(魚川察訪)이었던 아버지 조원강이 평안도 희천으로 부임하자 그곳으로 따라가 무오사화로 화를 입고 희천에 유배 중이던 김굉필을 만나 학문을 배웠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는 1510년(중종5년) 소과에 장원급제 한 후 1515년(중종10년) 대과에 급제하였는데 이때 그의 나이 34세였다. 조선왕조 500여년동안 대과 급제자 평균연령이 36.7세였다고 하니 조광조는 조금 어린 나이에 급제하였다고 볼 수 있다. 조광조는 인물이 훤칠한 당대의 미남이었다고 한다. 물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면서 "이것이 어찌 남자의 얼굴이란 말이냐"라고 스스로 탄식하였고 그가 거리에 나서면 아녀자들이 담장 밖으로 고개를 빼꼼히 내밀고 구경을 할 정도였다 하니 그의 미모를 짐작할만 하다.
조광조가 대과에 급제하여 정계에 진출하던 당시 시대적 상황은 연산군을 몰아내고 중종을 왕위에 올린 훈구파 세력들이 권력을 휘두르던 시기였다. 훈구파는 조선왕조 건국에 참여한 공신세력의 후예들로 수도권에 기반을 두고 대규모 부동산을 소유한 이른바 보수세력들이었다. 이들의 추대로 왕위에 오른 중종은 이들 세력들의 위세에 눌려 처음 10년간은 허수아비 왕으로 지낼 수 밖에 없었다. 훈구파 대신들이 입궐하여 정사를 논하고 물러갈 때, 왕이 엉겹결에 일어나 공손히 배웅을 할 정도였다고 하니 이들의 위세가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만 하다. 이들은 당시의 권력기관인 사헌부와 사간원을 장악하고 정국을 좌지우지 하였는데 사헌부는 관리들의 비리와 부정부패를 감시하고 처벌하는 요즘 말하는 검철청이고 사간원은 임금과 관리들의 잘잘못을 비판하고 지적하는 기관으로 오늘날 언론기관과 유사한 기능을 담당했다.
중종이 실추된 왕권을 회복하기 위해 절치부심하던 차에 나타난 조광조는 중종에게 '히든카드'였다 원래 개혁이라고 하는 것은 사람을 물갈이 하는 인적청산과 제도를 바꾸는 제도적 개혁이 있는데 중종은 인적청산에 손을 댔다. 인적청산은 사람을 잘라내야 하는, 손에 피를 묻히는 작업인데, 중종은 이일을 스스로 하지 않고 조광조를 앞세웠다. 중종이 조광조를 개혁의 전면에 내세우게 된 것은 조광조가 급제한 직후부터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소신것 개혁 의지를 펼쳤기 때문이다. 대과 급제 후 사간원에 배치된 조광조는 왕에게 직언할 수 있는 자신의 직무 특성을 활용해 집권세력인 훈구파들에 대한 비판을 쏟아냈고 급기야는 자신도 사간원 소속임에도 불구하고 사회개혁을 위해 사헌부, 사간원 관리들을 전원 해임하라는 상소를 올렸다. 그러자 중종은 조광조 상소가 올라오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조광조의 건의를 받아들여 조광조를 제외한 사헌부, 사간원 관리 전원을 전격적으로 해임시켜 버리고 조광조를 중심으로 새로운 혁신정권을 탄생시켰다.
막강한 훈구파 세력을 일거에 정리할 수 있었던 것은 중종의 신속한 결단도 있었지만 훈구파들의 방심도 한 몫을 했다. 이제 겨우 34살의 신참 관리가 올린 상소를 임금이 설마 받아들이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고 방심하다가 불의의 일격을 당한 것이다. 이를 계기로 지방에 기반을 두면서 도덕과 의리를 바탕으로 왕도정치를 표방하는 이른바 진보세력인 사림파가 권력의 전면에 나서게 되었다. 중종의 두터운 신임과 사림파에 대한 재야 선비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얻은 조광조는 거침없는 개혁을 강하게 밀어부쳤다.
우선 관리를 선발할 때 시를 잘 짓거나 유교 경전 해석을 잘하는 것만을 기준으로 선발할 경우 참다운 인재 선발이 어렵다고 주장하고 숨은 인재 발굴을 위해 여러 계층과 지역으로부터 인재 추천을 받아 심사와 면접을 거쳐 관리를 선발하는 요즘 말하는 다면평가 방식의 '현량과'를 실시하였다. 또 세상의 질서 유지를 위한 학문은 오직 성리학임을 주장하면서 나라에 안 좋은 일이 있을 때 임금이 제사를 지내던 도교의 성격이 강한 궁궐내 '소격서'를 중종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폐지 하였다. 이는 중종과 조광조의 관계가 틀어지기 시작하는 계기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중종반정 때 공을 세운 정국공신(靖國功臣)들의 수가 너무 많다고 지적하면서 실제로 공을 세우지 않은 공신들을 가려내야 한다고 주장하고 중종과 대신들의 강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전체 공신 117명 중 4분의3에 해당한 76명을 공신록에서 삭제하고 받은 직위와 재물을 모두 반납케 하는 '위훈삭제'를 단행했다.
조광조의 이러한 급진적인 개혁으로 사림파의 세력이 급격히 커지게 되자 중종은 차츰 위협을 느끼게 되고 이들을 경계하기 시작했다. 중종이 사림파를 등용한 것은 훈구파를 견제하고자 함이지, 사림파가 주도하는 정국을 원하는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던 차에 위훈삭제로 불안과 분노가 극에 달한 훈구파가 나뭇잎에 '주초위왕(走肖爲王)'이라는 글씨를 꿀로 써놓고 개미가 파먹게 한후 이를 중종에게 보여 주면서 조씨가 왕위에 오르려 한다고 고변하자 중종은 기다렸다는 듯이 이번에는 이 사건을 빌미로 사림파 세력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을 단행하였는데, 이것이 이른바 '기묘사화'다. '기묘사화'로 조광조는 전남 화순군 능주면에 유배되었다가 1519년(중종14년)에 사약을 받게 되니 그의 나이 38세였고 개혁을 시도한지 불과 4년만이었다. 조광조는 사약을 받는 마지막 순간에 "먼길을 가야 하니 내 관을 두껍게 하지 말라"고 하였다 한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젊은 선비가 죽음을 목전에 두고도 생사를 초월한 의연한 모습을 보였다 하니 그의 기개가 새삼 전율을 느끼게 한다.
조광조를 중심으로 한 사림파의 개혁이 실패한 원인은 이들 대부분이 젊은 신진사류들로 정치적 경륜도 짧은 데다가 개혁을 너무 급진적이고 과격하게 시도하다가 노련한 훈구파 세력의 반발로 실패한 것이다. 일찍이 고 김대중 대통령께서 정치인이 가져야 할 덕목으로 말씀하신 '서생적 문제의식과 상인의 현실감각'이 새삼 생각난다.

영암군민신문 yanew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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