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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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

이진 前) 영암군 신북면장 前) 전라남도 노인복지과장 前) 완도부군수
<조선왕조실록>은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된 우리나라 역사서로 조선왕조 제1대 왕 태조로부터 제27대 순종에 이르기까지 27명 조선 왕들의 518년에 걸친 역사를 2천77책으로 기록한 역사서다. 조선왕조 실록 중 <고종황제실록>과 <순종황제실록>은 일제 강점기에 일본인들의 지시를 받으며 편찬되었기 때문에 실록으로서 가치가 크게 손상되어 실제로는 25대 철종까지 472년간의 기록을 조선왕조실록이라 할 수 있다. 조선왕조실록 책 한권의 두께가 1.7㎝정도가 되니 이를 차례로 쌓아 올리면 아파트 12층 높이가 되는 방대한 기록이다. 다른 나라에도 역사기록이 있지만 대부분 왕실에서 일어난 정치 내용만 기록하고 있는데 조선왕조 실록은 왕실 기록 뿐만 아니라 민초들의 다양한 삶의 내용까지 세세하게 기록하고 있어 다른 역사서에 비해 사료적 가치가 훨씬 높다고 볼 수 있다.
역사기록이란 무엇보다도 일어난 일들을 사실적이고 객관적으로 기술하는 것이 중요하다. 조선왕조실록은 실록편찬의 공정성, 객관성을 확보하기 위해 왕이 생존해 있을 때 만들지 않고 왕이 승하하고 난 뒤에 춘추관에서 임시관청인 실록청을 만들어 편찬했다. 실록편찬을 위한 자료는 임금이 집무를 보면서 하는 말을 사관들이 속기로 받아 적은 '사초', 왕의 명령을 일기체로 정리한 '승정원일기', 정부 각 기관에서 보고한 문서 등을 정리한 '시정기', 일반 선비나 재상들이 왕에게 간언한 '상소문', 그리고 '개인문집' 등이 총 망라된 자료를 수집, 이를 정리하여 편찬했다. 실록 편찬당시 임금이 혹시라도 선왕의 기록에 대한 외압행사를 막기 위해 임금은 선왕의 실록을 절대로 볼 수 없도록 하였다.
이렇게 편찬된 실록들을 안전하게 보관하기 위해 세종때 4대 사고(춘추관-한양, 충주, 전주, 상주)를 지정 분산 보관하였으나 임진왜란 시 전주 사고만 남고 모조리 불타 없어지고 말았는데 광해군때 전주사고본을 필사, 5개를 만들어 다시는 멸실의 화를 입지 않도록 깊은 산속에 보관하도록 하여 춘추관(한양), 묘향산, 태백산, 오대산, 정족산에 보관하게 되었다.
조선왕조시대 왕위는 정실왕비 소생인 적장자가 이어가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으나 반드시 지켜진 것은 아니었고 당시 정치세력들의 힘의 논리에 의해 왕위 계승자가 결정되기도 하였다. 21대 영조는 어머니가 궁녀들의 옷을 빨아주던 천민 무수리 출신이었지만 당시 노론 세력들의 지지를 기반으로 왕위에 올라 52년이나 재임한 조선왕조 최장수 제왕을 기록하였다.
조선시대 왕들이 왕위에 올랐다 하여 모두 강력한 권한을 쥔 군주로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왕 자신의 자질과 정치 세력들과의 관계설정에 따라 왕의 위상이 크게 달라졌다. 11대 중종은 훈구파들이 반정을 일으켜 하루아침에 왕위에 오르게 되었는데 재임 초기에는 훈구파들의 위세에 눌려 왕으로서 권한을 전혀 행사하지 못하고 심지어는 자신의 조강지처인 단경왕후가 친정 아버지가 중종반정에 참여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훈구파에 의해 폐비가 되어 쫒겨나가는 것을 속수무책 바라볼 수 밖에 없을 정도였다. 무려 10년동안이나 허수아비 왕으로 지내던 중종은 당시 개혁성향이 강한 사림파의 조광조를 앞세워 훈구파 세력을 몰아내고 왕권을 회복하였으나 이후 사림파 세력이 커지게 되자 이번에는 다시 훈구파를 이용해 사람파를 몰아내는 등 정치세력 균형을 유지하는 방법으로 왕권을 강화 하였다.
조선왕조 기록을 보면 정실부인 왕비 이외에도 후궁들이 많은 것을 볼 수 있는데 왕자들을 얻기 위해 왕실이나 신하들이 후궁을 많이 두도록 권장 하였다고 한다. 제9대 성종은 무려 3명의 왕비(폐비포함)와 9명의 후궁을 두었다. 조선왕조 초기에는 왕비나 후궁들 사이에서 여러 왕자들이 있었지만 후기에는 어찌된 일인지 왕자들이 태어나지 않아 왕위 계승에 애를 먹어 양자를 입양하는 편법으로 어렵게 왕위를 이었다. 그러다 보니 25대 철종 같은 경우는 강화도 나뭇꾼을 데려다 왕위에 올리기도 하였다. 국운이 쇠태해 지다 보니 후사를 이을 왕손도 쇠태해진 것이 아니었던가 하는 생각이 든다.
조선왕조 실록을 살펴보면서 객관적이고 공정한 실록을 편찬하기 위해 여러 가지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고 실록을 후대에 길이 전수하기 위해 여러 곳에 분산 보관하는 등 역사의식에 투철한 선조들의 지혜와 노력을 엿볼 수 있었다. 왕위자리가 혈통에 의해 이어지지만 그 과정에서 왕위자리를 놓고 치열하게 벌어지는 정치세력들의 암투는 오늘날 정치현실의 데자뷰를 보는 것 같고 조선왕조 518년의 역사속에 나타난 제왕들의 행적을 보면서 한 시대 지도자의 자질이 민초들의 삶을 어떻게 바꾸었는지도 알 수 있었다.
역사란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이고 과거의 사실과 현재의 역사는 서로 연관되어 있다. 조선왕조 실록은 지나가버린 과거의 기록이 아니라 우리들 미래의 거울이라 할 수 있다. 우리는 과거의 역사를 보면서 오늘의 현실을 진단하고 앞으로 나아갈 바를 결정해야 한다. 그리고 후대까지 길이 전해지는 역사앞에 부끄러움이 없는 시대정신을 갖고 살아야 할 것이다.
영암군민신문 yanew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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