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랑스러운 영암인, 한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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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랑스러운 영암인, 한현상

이영현 소설가 양달사현창사업회 사무국장
1920년 5월 18일 동아일보에 게재된 영암군 최초의 현대시다. 1920년 4월 1일 창간 당시만 하더라도 동아일보는 민족지의 성격이 강했고, 거기에 감동한 별샘 한현상(韓晛相)은 '동아일보를 읽고 나서'라는 축시를 바쳤다.
한현상은 1900년 5월 8일, 영암면 교동리에서 태어난 우리 영암사람이다. 독립운동의 선구자 한남수(임시정부 재무부차장)가 숙부이고, 영암보통학교 담임이 석초 조극환 선생이었으며, 낭산 김준연과는 가까운 인척간이다. 서울 중앙중학교를 마친 후 도일하여 니혼대학을 다녔다. 목포영흥학교에서 교편생활을 하던 1920년대 초부터 목포기독교청년회 간부로서 강연과 언론 기고, 시 발표 등을 하다가 1922년 7월에 발생한 영암보통학교 휴학동맹의 배후로 지목되어 파면되었다.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아나키스트 박열 등과 비밀결사조직 불령사(不逞社)를 조직한 것이 발각되어 1923년 10월 구속되었다가 이듬해 6월 풀려났다. <백십자(白十字)> 간부로서 독립운동과 박애주의 사상을 전파하였고, 1935년에는 동경대지진 희생 조선인 추모식을 주최했다. 그해 11월 잡지 <삼천리>는 '동경에서 활약하는 인물들' 특집에 재일 조선인 종교계 대표로 한현상을 꼽았다.
"한현상. 이분은 동경시에서 일본인이나 조선인을 막론하고 그의 정신적 노력을 감탄치 않는 이가 없다. (중략) 무산 아동교육과 자선사업에 노력하고 있는 분으로 (중략) 이분의 동경 학창 시대에는 이여성씨와 동창이었다." 이여성은 훗날 월북하여 김일성대학 교수가 된 북한의 거물급 정치가다.
1938년 8월 동아일보의 '재동경 조선인 활약 전모'에도 소개될 정도로 일본 제국주의 타도에 앞장선 한현상은 해방 후 재일거류민단 선전국장으로서 신탁통치반대 운동을 펼쳤고, 한일수교 때는 재일거류민단의 입장에서 올바른 대일 외교 방향을 제시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아직까지 독립운동유공자 포상을 받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고향 영암에서는 완전히 잊힌 존재가 되었다. 경북 박열 기념관에서는 그의 편지를 전시하고 있지만, 1954년 <영암군향토사> 발간 소식을 듣고 한현상이 보낸 장문의 감상문은 지금 이 순간에도 국가기록원에 방치돼 있다.
임인년 새해가 밝았다. 하지만 영암의 역사 바로 세우기는 여전히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 답답하다. 조선 최초 의병장 양달사와 영암 독립운동의 횃불 조극환 선생에 이어, 독실한 크리스천이자 아나키스트인 한현상을 올해의 자랑스러운 영암인으로 소개하면서, 한현상이 엄혹한 일제 치하에서 1921년 7월 1일 <개벽> 창간 1주년 현상공모에서 입선한 시를 군민 모두가 서글픈 심정으로 한번 음미해 보시기를 권한다.
옛날의 느낌
P야! 오, 나의 옛사랑아!
오! 무엇보다도 질기던 연사(戀絲)야!
오! 상전벽해를 의심하던 연정(戀情)아!
과거의 낙원에서 행복이던 꿈아!
둘이서 그것이 단장(斷腸)의 씨가 되누나!
P야! 사탄의 독와사(毒瓦斯, 독가스)에 마비되었구나!
영원히 오지 않을 행복의 추억아!
오! 나의 흉부야?
현실의 폐허인 애처로움아!
천진 어린 영(靈)의 첫 놀램아!
오! 이 상처를 어찌할꼬!
세상은 모두 다 봄이다.
그러나 내 몸엔 아직도 겨울...

영암군민신문 yanew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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