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영암문화유산 제2호, 대월루(對月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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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사라진 영암문화유산 제2호, 대월루(對月樓)

이영현 양달사현창사업회 사무국장 영암학회 회장 소설가
'월출산을 마주하고 있는 누각'이라는 뜻의 대월루는 영암의 누정을 대표하던 누각으로, 1972년 영암군향토지 159쪽을 보면 이렇게 기록돼 있다. '대월루는 이조시대 3대루 중의 하나이다. 하재(下材)는 석주(石柱)로 돼 있고, 상재(上材)는 목재로 되었다는데, 들보를 갈근(칡뿌리)으로 하여 유명하였다고 한다'. 이처럼 대월루가 조선 3대 누각 중 하나라고 기록되어 있으므로 필자는 영암성을 '사라진 영암문화유산 제1호'라고 한 데 이어 대월루를 '사라진 영암문화유산 제2호'라고 부르고 싶다. 영암군향토지의 대월루 연혁은 오류가 많아 오늘은 대월루의 규모와 특징 등에 대해서만 소개하겠다.
대월루에 대한 가장 오래된 영암군지의 기록은 1765년 각 군현의 읍지를 편집한 여지도서로 '객관(현 군청) 앞에 있다(在客館前)'라고 돼 있고, 1793년 영암지(靈巖誌)에는 '동문 안(東門內)'에 있다면서 김시습(金時習)의 시를 소개하고 있다. 참고로 이후 발간된 영암군지들에는 김습(金習)이라고 돼 있는데, 김시습의 '시(時)'자(字)를 빠뜨린 것으로 보인다. 김시습은 과거를 포기하고 28세 때인 1462년 나주, 남원 등을 유람하였는데, 이 무렵 영암에 들렀던 것 같다. '낭주 월출산은 남방의 자랑인데, 높다란 누각이 월출산과 마주서 있구나(朗州形勝擅南方??高樓對月岡)'라고 시작되는 시구에는 김시습만의 호기가 배어 있다.
두 번째 기록은 1555년 5월 25일 영암성대첩 직후 우도방어사 김경석의 종사관인 양사준이 읊은 정왜대첩(征倭大捷)이란 시다. 우리가 영암성대첩이라고 부르게 된 바로 그 시로, 그의 형 양사언의 봉래집을 보면 '장군의 승전을 만인이 보았고 병사들은 집으로 돌아갔다(중략). 서늘한 밤 누각에 홀로 앉아 있자니 연꽃이 꿈결에 얼굴을 내민다(將軍一捷萬人觀壯士從遊?可還高閣夜凉仍獨坐荷花偏似夢中顔)'라고 돼 있다. 그러나 1530년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강삼(姜參) 군수가 지은 양휘루(揚輝樓)만 소개돼 있어, 김시습과 양사준이 언급한 누각이 대월루인지는 불분명하다.
대월루라는 이름이 정확히 나온 기록은 나주 회진 출신 임영(林泳, 1649-1696)의 신유일록(辛酉日錄)이다. 1681년 전라도에 시관(試官)으로 내려와 8월 12일 대월루에 올라갔다. '객관 앞 대월루는 특히 아름다워 촛불을 들고 올라가서 보고는 주저 없이 누대 위 작은 방에서 묵었는데 한밤중에야 잠이 들었다(客館前對月樓尤佳張燭登覽顧忘躊躇仍宿樓上小房夜分乃寢)'. 이 글로써 대월루에 작은 방이 있었다는 것도 알 수 있는데, 임영은 신북 호산마을의 숙부 임장유에게서 공부를 했고, 금정에 그의 신도비가 있다.
그리고 100여년이 흐른 1777년 대월루는 영암군향토지와 거의 같은 내용의 멋드러진 건물로 개축된다. 유항주(兪恒柱, 1776~1778 재임) 군수가 스승뻘인 이헌경(李獻慶, 1719-1791)에게 대월루 건립 사실을 편지로 알렸고, 그 내용을 이헌경은 '영암대월루기(靈巖對月樓記)'로 남겼다. '대월루를 이번에 새로 크게 지었습니다. 누의 상하층이 각각 15칸(1間=1.8m)이고, 하층의 기둥은 모두 석주(石柱)를 사용했습니다. 높이가 2장3척(1丈3=3m)입니다. 장엄하고 화려한 모습이 거의 일로(一路) 중 으뜸입니다(對月樓今新而大之樓上下層各十五間下層皆以石柱高二丈三尺者承之壯麗殆甲一路)'. 여기에서 일로(一路)는 서울에서 영암으로 오는 삼남대로를 말한다. 유항주 군수가 수천금을 들여 그야말로 거창하게 지은 것이다. 가로 기둥 6개, 세로 기둥 4개인 15칸(약 17평) 누각으로 높이도 7미터가 넘는다. 1872년 영암군 지도를 보면, 성내에서 가장 큰 객사(客舍)와 규모가 비슷하고, 청색 기와에 팔작지붕이다.
하지만 1908년 3월부터 심남일 의병장을 비롯한 영암 의병대가 국사봉에 '호남의소'를 두고 투쟁하고, 이들을 토벌하러 온 일본군이 영암성에 주둔하면서 대월루의 운명이 바뀐다. 일제는 점령군처럼 우리의 객사와 동헌, 훈련청 등을 숙소로 멋대로 사용하면서 기병대의 말에게 먹일 꼴을 대월루에 쟁였다. 그리고 1920년 2월 20일, 일본군의 실화(失火)로 대월루뿐 아니라 객사까지 불길에 휩싸여 대월루는 영암에서 사라졌다.
지난 8월 25일 영암읍사무소에서 '군청 앞 광장 및 군민의 강 조성계획' 설명회가 있었는데, 필자는 주위의 권유로 잠시 들러 대월루 등 역사성을 참고하여 줄 것을 건의하였다. 사정이 허락한다면 군민의 강에 대월루를 지어놓고, 관광객들에게 영암의 역사를 얘기해 주면 좋겠다는 발언이었다.
오늘은 유항주 군수가 대월루를 개축하고 쓴 시의 마지막 연을 소개하면서 글을 마무리하겠다.
'단청이 은은한 대월루 연지에 그림자 드리우고, 기둥과 서까래엔 유자향이 서려 있네. 태평성대에 이 봄도 때맞춰 오니, 화려하다고 소문난 대월루 명승으로 전해지리(丹靑隱映池塘影楹?迷離橘?烟太平今春來不晩名因華構勝區傳)'.
영암군민신문 yanew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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