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 만에 핀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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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 만에 핀 꽃

정 찬 열
LA남부한국학교장
군서면 도장리 출신
우리 집 뒤뜰 레몬 나무에 꽃이 피었다. 20년 넘도록 열매를 맺지 못하던 나무가 꽃을 피운 것이다. 반갑고 기뻤다. 그런데 올해라고 특별한 관리를 한 것도 아닌데 어찌된 일일까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집히는 게 있었다.
이곳으로 이사 온 다음 해부터 석류나무와 감나무 등, 과일 나무를 차례로 뒤뜰에 심었다. 그 중 석류나무는 해마다 석류가 풍성하게 열려 술을 담기도 하고 이웃에게 나누어 주기도 했는데, 다른 나무는 열매가 시원치 않았다.
5년 전이던가. 복숭아나무가 맘에 들지 않아 베어버리고 다른 나무를 심자고 했더니 아내가 반대를 했다. 이듬해 이른 봄, 녀석이 보란 듯이 꽃망울을 수도 없이 터트렸다. 복숭아나무에게 좀 미안한 생각이 들어 ‘누가 시인일까’라는 시 한 편을 썼다.
이사 온 다음 해 뒤뜰에 심었던 / 복숭아나무가 열매를 잘 맺지 않아 / 베어버리자고 했더니 / 아내가 펄쩍 뛰었다 // 저것도 목숨인디 / 잘 크는 나무를 뭣땜새 뜬금없이 / 잘라버리자 하느냐고 / 집안에 복숭아나무가 있으면 / 여인네가 고무신을 거꾸로 신는다는 / 속설을 믿고 혹시 그러냐고 / 기를 쓰고 말렸다 // 먼 산에 하얗게 눈이 쌓였는데 올 봄도 / 꽃망울 터트려 환한 봄소식 전해주는 / 나무를 바라보며 / 떠오르는 생각하나 // 하마터면 생목숨 잘릴 뻔 했던 / 녀석의 눈에는 / 누가 시인일까 / 나일까 / 내 마누라일까
그런데 지난해 겨울, 아내가 복숭아나무를 잘라내고 배롱나무를 심으면 어떠냐고 물었다.
필렌 사는 후배네 집 앞 배롱나무가 기품있고 멋있지 않더냐며, 뒤뜰 창문을 열면 바로 보이는 좋은 곳에 그 나무를 심자는 것이었다. 복숭아나무가 열매는 보잘것없지만 꽃이 좋지 않더냐고, 이번에는 내가 반대를 했다.
뜰은 넓지 않은데 배롱나무를 들여와야 한다면 어디가 좋을까 싶어 뒤뜰을 한 바퀴 둘러보았다. 대추나무와 오렌지나무를 비롯 모두들 나를 베어내서는 안 된다는 듯, 나무들이 이파리를 살레살레 흔들어 댄다. 자연스럽게 귀퉁이에 서 있는 레몬나무에 눈길이 멈췄다.
열매를 맺지 못했지만 오래 기다려 주었는데 아무래도 저 녀석을 뽑아낼 수밖에 없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만 제법 크게 자란 나무를 선뜻 베어내지 못하고 차일피일 여러 날이 지났다. 그러던 어느 날, 마침 나무를 잘 아는 선배님과 뒤뜰에서 대화를 나누다가 이러저러한 사정으로 레몬나무를 베어내려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시느냐고 의견을 물었다. 그러자 “성서에도 열매를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는 잘라내어 불에 태워버려라”고 했지 않느냐며 솎아내고 좋아하는 나무를 심으라는 답을 주셨다.
이 봄을 지나면서도 꽃을 피우지 않으면 그 자리에 배롱나무를 심기로 내심 마음을 굳혔다.
그런데 그런 내 계획을 꿰뚫어 보기라도 한 것처럼, 레몬나무가 용을 쓰고 꽃을 피워냈다.
오랜 세월 기다려준 주인에게 화답이라도 하려는 듯, 결정적인 순간에 뒤뜰을 환하게 밝혀준 것이다. 봄만 되면 염치도 없이 꽃을 많이 피우던 복숭아나무 바로 옆에서 이 녀석도 마음고생 꽤나 했을 성 싶다. 식물도 인간과 교감을 한다며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도 허투루 하지 않던 어떤 분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20년 만에 핀 레몬 꽃을 다시 바라본다. 시집보낸 딸이 아이를 갖지 못해 오랫동안 기다리며 걱정하고 계시는 선배님이 생각났다. 풀꽃들이 다투어 피어나는 이 봄, 딸애가 반가운 소식을 보내 왔다는 기별이 조만간 들려올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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