異見은 善惡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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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異見은 善惡이 아니다

이원형
동국대 정치외교학과 졸업
(주)시흥유통 법무실장
(주)라카데미 전임강사 겸 부사장
민주는 글자 그대로 국민이 주인이라는 뜻이다. 민주국가는 주인인 개인의 인권과 자유 등 민주적 기본질서를 실현시키는 것을 임무로 한다.
민주국가 에서는 국민(주인)의 의견이 다양하다는 전제하에 서로 다른 의견을 수렴하고 비록 이견(異見)이라도 존중하여 공존을 도모한다.
그리하여 주인인 국민의 의견이 다양하다는 전제하에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한 도구로 다수결이란 제도를 고안하였다. 다수결이란 이념이나 가치도 아니고 또 다수의 의견이 소수의 의견보다 옳다는 것도 답보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다수결이란 다수와 소수의 가변성과 소수자 보호의 전제하에 만들어진 민주주의 실현을 위한 도구로 기능할 뿐이다. 오늘의 다수의견이 내일의 소수의견이 될 수도 있다는 점은, 비록 이견이라도 존중되어야 하지 배척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우리에게 시사하는 것이다.
조선 숙종 때 남인학자 백호 윤휴가 사문난적으로 몰려 죽임을 당하였는데 이때 남인들은 윤휴의 사사의 배경을 우암 송시열이라 비난하였다. 원래 송시열과 윤휴는 비록 당파는 달랐으나 친구사이였다.
그러나 윤휴가 논어와 논어집주 그리고 중용과 중용집주를 가지고 송시열과 논쟁을 벌였고 이로 인해 윤휴를 사문난적으로 몰아 죽였다는 것이다. 윤휴는 학문이나 사상의 절대성을 인정하지 않는 유연한 학자였다. 윤휴에게는 어떠한 사상은 부분적인 진리만 담고 있는 상대적인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이이나 이황의 학설은 물론 주희의 학설도 비판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송시열은 논어나 중용등 사서 자체 보다는 사서에 대한 주희의 해석을 중시하여 주희의 논어집주나 중용집주를 금과옥조로 여겼다.
그런데 윤휴가 주희의 중용집주를 개작하여 자신의 견해로 주석을 달겠다고 나서자 송시열은 “주자 이후로는 일리(一理)도 밟혀지지 않는 것이 없고 일서(一書)도 명학해지지 않는 것이 없는데 감히 윤휴가 자신의 견해를 내세우다니 이는 진실로 사문난적이다”라고 비판하며 격분했다.
이에 윤휴는 “천하의 이치를 어찌 주자만 알고 나는 모르겠는가? 주자가 살아온다면 나의 학설을 인정하지 않겠지만 공자가 살아온다면 내 학설이 승리 할 것이다. 이제 주자는 덮어두고 오직 진리만을 연구해야 한다”고 반박했다. 문제의 논어논쟁은 논어 제10편 향당(鄕黨)에 나오는 마구간 구절로 마구간에 불이 났을 때 공자가 한 말을 윤휴가 달리 해석한 사실을 말한다.
공자가 마구간에 불이 났다는 말을 듣고 ‘사람이 다쳤느냐?’만 묻고 말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는 것인데(傷人乎? 不問馬) 윤휴가 공자의 傷人乎를 傷馬乎로 바꾸어 해석하여 송시열과 대립했다는 것이다. 송시열은 공자가 사람을 중시하여 말해 대해서는 묻지 않았다는 주희의 해석을 따랐지만, 윤휴는 마구간에 불이 났으면 말이 다쳤느냐 묻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이라며 사람(人)을 말(馬)로 바꾸어 해석하여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또한 송시열은 미촌 윤선거가 윤휴와 절교하지 않고, 미촌의 장례에 윤휴의 문상을 미촌의 아들이자 자신의 제자인 명재 윤증이 거절하지 않았다는 이유와 미촌의 비문사건으로 老·小論의 분당을 초래하였다.
물론 송시열이 윤휴를 직접 죽인 것도 아니고, 또한 윤휴가 예송논쟁 때 윤선도와 함께 송시열을 죽이려 한 적도 있어 윤휴의 죽음에 송시열이 방관했음을 비판할 수도 없다. 다만 異見이 부정되고 절대성이 강요되어 공존의 틀이 깨진 당시 조선 당쟁구조의 비극이 윤휴와 같은 억울한 죽음을 연이어 초래하게 되었다.
이는 조선사회의 분열을 초래하여 급기야 조선 멸망의 먼 원인으로 작용했음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아무튼 송시열은 문묘에 배향되고 퇴계나 율곡도 받아보지 못한 宋子로 불리우며, 서인 그것도 노론에서는 大老라 추앙을 받았지만 남인의 고장 영남에서는 ‘시열이’, 심지어 강아지 이름으로 시열이라 부르며 사람취급도 받지 못했다.
이상의 역사적 사실로 볼 때 異見은 결코 善惡이 아니라 하겠다. 다시 말해 異見은 생각이 다를 뿐이기에 그 자체로 존중되어 공존해야 하지만. 善惡은 취사선택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가 나와 다른 의견을 단지 異見이라는 이유로 배척한다면 우리 사회는 반목과 대립으로 점철되어 보다 나은 미래로 나아가는데 가장 커다란 걸림돌이 될 것이다.
그래서 우리 영암의 몇몇 사안에 대한 서로 다른 주장을 배척해야 할 善惡이 아닌, 존중받아야 할 異見으로 인정하고 공존하는 지혜를 발휘하는데 중지를 모아야 할 것이다.
이원형 www.yanews.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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